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출애굽기 28: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편 115:11
주의 일을 행한다는 것. 그의 거룩한 옷을 입고 그 직분을 감당하는 데 있어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주신 날 동안에 주의 뜻에 따라 거룩하여지기를. 거룩이란 구별됨으로 주의 선별 중에 있는 삶이었다.
곧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어 우리의 삶은 성별된 것이다(히 9:4). 늘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 같고 연약한 육신은 힘에 겨워 쩔쩔매면서도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거룩을 입어야 죽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이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계명이 새겨진 언약의 돌판이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나는 그럴 수 없는 죄인인데 나로 그럴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놀라운 은총이었다.
갑자기 위경련이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면서, 또 곁의 사무실이 구조변경을 위해 공사를 하면서 일으키는 소음과 먼지를 감내하면서, 나는 잊고 있었는데 한 친구는 신학을 하는 동안 등록금을 한 번도 대주지 못한 것에 대해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고. 내 몸 안의 일인지 내 몸 밖의 일인지, 사는 날 동안에 이 모든 게 한데 뒤엉켜 혼잡하기 이를 데 없고. 명절이 또 가까워지면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염려가 마음을 어렵게도 하는데.
나만이 나여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인도하심을 누릴 수 있었던 증거가 ‘만나 항아리’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별개의 삶을 구축하는 증거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다 하지 못한다. 나 자신 자체로 기적을 체험하는 삶이었으니. 좀 낫거나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의 여정이었음을 기념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러므로 나에게 만나란 지극히 사소한 일상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돌아보면 매순간 어느 한 부분 부분마다 주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오전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토요일에 무슨 일로들 만났었던가보다.
그 중에 누가 내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며 연락을 한 것인데, 주일 전날이라 일찍 잠이 들어서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술에 취해서는 언제 나를 꼭 만나야 한다나. 신대원을 할 때 등록금을 한 번이라도 대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면서. 그러면서 저의 대화는 술주정인지 뭔지, 나는 뜬금없는 저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덕분에 새삼 나의 날들이 ‘만나’로 이어져 주의 돌보심 가운데 있는 게 아닌가? 어느 것 하나, 언제든 한 번도 주의 은혜가 아닌 적이 없었다.
아, 나는 그의 소유가 됨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떡, 은총과 긍휼과 자비와 인자하심이 나의 걸음걸음마다 찍혀지고 기념되어 담겨 있는 나만의 ‘만나 항아리’는 값진 거였다. 그 친구가 왜? 느닷없는 저들의 이야기 속에 내 이야기가 놀라웠다. 종종들 모여 그처럼 술잔을 기울이며 주정처럼 기독교를 또는 자신들의 신앙을 안주거리로 삼는 모양인데, 내 입에서는 괜히 쓴 맛이 돌았다. 측은하고 안쓰러워서 말이다.
자칫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은 아닐는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언제나 우리는 영적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처럼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 공교롭게도 선교사로 나갔던 사업가와 목사 딸과 장로 아들로 다들 믿는다고 믿는 친구들이었으니.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방식으로 주 앞에 서는 것이다.
이를 엄중히 가려 구별하는 것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이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반기를 들어 모세와 아론뿐이 아니라 자기들도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믿고 섬긴다고 우쭐하는 것이었으니. 내가 함께 어울리던 저 친구들 무리와 같지 않았던가.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쩌고, 기독교는 무엇이라는 식의 자기들 오랜 경험과 타성에 젖은 이해와 판단이 술 한 잔 정도야! 안 믿는 자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선을 이루면서 자기들 방식대로 주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으니.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방식만이 온전함을 일깨우신다. 우리에게 보이시는 본을 따라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그러니까 오직 유일한 길로 갈 것이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이 터는 오직 예수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저가 본을 보이신 길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그리하여 우리의 중보자는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하신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이것은 의무다.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다. 이치다. 토요일 저녁, 광화문 어디에서 무슨 공연을 보고 다들 모여 술 한 잔을 하며 취중진담인지 알 수 없는, 자기 안의 거룩한 부채감에 대하여 그리 안줏거리삼아 횡설수설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이 섞여 혼재할 수는 없다. 아닌 건 아닌 거지 아니면서 아닌 게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다. 다들 나름 믿는다고 믿는 친구들이었다. 나도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다.
한데 이제는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그리 될 수가 없다. 같은 말을 하는데 다른 내용일 따름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전에 같으면 그게 뭐 어때? 하고 같이 어울렸을 법한데 이제는 아니라. 우리에겐 엄연한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다.
본을 보이신 길, 곧은 길. 하나님의 축복을 알려면 거룩한 길로 가야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결코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라고, 마음이 편안하라고, 행복감을 느끼며 살라고 하는 정도의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전혀 다른, 형질과 목적과 그 결과가 전혀 다른 자의 삶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와 같은 각오와 결단이 결코 서로가 같을 수 없는 절대적 별개의 구분이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 한편으론 그립고 부럽고 같이 하지 못해 외롭기도 하지만, 더는 그러지 못하게 하시려고 오늘 날 내게 두시는 신경쇠약도 엄연한 축복이었다. 술에 취해 하는 말 따위로는 주를 고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결단코 우리를 그처럼 호락호락 내어주시지 않는다. 더는 빼앗기지 않으리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그리하여 세 번째 담긴 ‘두 돌판’이 있었으니 여전히 우리를 바른 길 가게 하시는 말씀과 기도이지 않겠나? 언약의 돌판을 기념하라 하신 덴 다 이유가 있다.
이처럼 말씀을 먹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만나처럼 이는 모아두어서 며칠씩 없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은혜는 매순간 매일매일 새로운 것인데, 이는 우리가 끼니마다 거르지 않는 양식과 같다. 내 안에 섞여 있던 죄로부터의 분리다. 그때마자 터져 나오는 감사다. 거룩한 삶이란 매순간 덧입는 말씀의 날실과 씨실로 짜이고 엮여서 그의 거룩한 예복을 입는 일이었다. 이는 영원한 것이다. 하루 이틀 하다 말 게 아닌 것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 28:43).” 오늘 말씀이 나는 그리 읽힌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내가 취할 영광이 아니다. 주의 이름만이 홀로 받으실 영광이다.
어디가 자꾸 아프고, 불안하고 초조하여 염려와 근심은 거침없이 들이닥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11).” 내게 들려주시는 오늘의 말씀이 복되었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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