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애굽기 29:46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시편 116: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3).” 그러므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그러므로 내가 어떤 자인지, 얼마나 값어치 있고 가치 있는 자인지!
곧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6).” 오늘 말씀은 이를 분명히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이다. 분명히 우리에게 간직하고 기념하라 하시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이 새롭다. 날마다 기적 같은 주의 돌보심이 있다. 때를 따라 적절하게 운영하시는 주의 긍휼하심이다. 이것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여전하여서 날마다 이뤄 가시는 주의 손길이다. 이를 올바르게 그 본을 따라 살게 하시는 데 있어, ‘본을 따라 하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이를 위해 성경을 주셨으니,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권위를 붙들고 살 수 있는 게 값지고 귀한 일이었다. 바른 길,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그토록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다.
곧 예수께서 그 터가 되신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하는 까닭은 여전히 눈앞의 세상이 더 가깝고 타당하게 여겨져서이다. 주의 이름으로 무얼 행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위해 주의 이름을 들먹이곤 하는 꼴이었으니. 세상은 패가 나뉘고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그 모여든 사람과 주로 나누는 화두와 온통 관심을 기울이는 것들에 대하여, 이것으로 증명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러했으면 하고 기도할 뿐이지 정작 어떻게 하라마라 한다고 될 것도 아닌 일에 대하여는 침묵도 하나의 증언이어서 묵묵히 주만 바라는 게 옳은 길이었다. 아이 문제로 나의 의견을 말할 뿐 아이에게조차 강요할 수는 없는 것에 대하여, 기도하면서 주께서 어찌 인도하시는가 보자, 그리 일러주었다. 이제 스물셋. 새로 직장을 얻고 일을 하면서,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겠으나 아이는 점점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맛을 느끼고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것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하고 묻는데 난들 그 답을 명쾌히 낼 수 있나! 다만 주께서 본을 보이신 길로 가자, 그리 일러 가장 용이한 쪽을 택하는 것일 뿐. 종일 머리가 너무 아팠다. 감기 기운도 있어서 몸은 어려웠다. 공사중이라 그 소음에 잡부들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로 머리가 지끈지끈하였다. 결국 다 저녁에 병원에 들러 주사를 한 대 맞고 약을 처방 받아 돌아왔다. 하루는 길고 한 주일은 짧았다. 돌아서기 무섭게 또 한 달이 흘러갔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그렇듯 회의가 일 때 성경에 주목하는 일은 참으로 값지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결국은 믿음이 승패를 가른다. 이를 어찌 믿을까? 그 표본을 한 사람 꼽으라면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노아가 아닐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저가 보이지 않는 일에 그처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일, 그의 터가 되는 것은 믿음이었다. 이를 또한 성경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로써 주가 사람이 되어 날 위해 오셨구나. 나의 죄를 담당하셨구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시려고!
말씀 앞에 서면 늘 새삼스럽지만 당연하게 들린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권세가 아닐까? 누가 누굴 인도하겠나!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눅 6:39).” 이를 알 때 내게 주밖에 답이 없음으로 안도한다. 뭐라 해도 소용없는 것이 늘어갈 때 내 안에는 어떤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횟수도 그만큼 늘어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전에는 절망하였다면 이제는 주를 바라는 동력이 된다.
특히 몸이 아플 때, 쩔쩔매면서 이내 주를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이어서. 아픈 게 좋다는 소리는 결코 아닌데 아파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어서는 신비롭다. 내가 곧 기적이었다. 이처럼 변하고 달라지는 나에게서 놀란다. 곧 그 바라는 것의 실상을 붙들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믿음이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이를 내게 두셨다는 것의 입증은 주를 더욱 바랄 수 있다는 데서 안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혼자 있으면서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실의에 젖기도 하지만, 이게 더 나은 것은 하나님이 친히 기뻐하심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4).” 곧 더 나은 제사란 믿음뿐이다. 직업이, 어떤 결실이, 그 결과로 이루는 게 아니었다.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성경의 구약과 신약이 구분될 게 아닌 까닭은 믿음으로 모든 선진들이 관통되기 때문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 그러므로 내가 바로 그 대상인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바로 아는 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족한 하루였다.
곧 나의 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데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러저러한 여건과 환경은 더 이상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아니 하루에도 수골백번은 갈리고 뜯기고 또 회의하고 갈등하기 일쑤라 해도,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이 신비롭고 복되었다. 아이에 대한 마음이나 내가 나로 인한 마음이나, 무엇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나 더는 어쩌기보다 묵묵히 주를 바라는 마음이나.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었으니 노아가 노아일 수 있었던 것,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일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어떤 업적이 아니라 그 믿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그 믿음이 하나였다. 에녹이 주와 동행하였던 것도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의 출처를 나는 더 이상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 두시고 그처럼 여겨주시는 데서 놀랄 따름이다.
결국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누가 내게 뭐라 하든, 내 스스로 내 자신에 대해 어떤 마음이 일든, 더는 그것에 연연할 것도 아니어서 다들 저 좋은 대로 사는 세상에서 나는 말씀을 따를 뿐이다. 너희가 모두 저쪽을 향한다 해도 나는 이쪽이라. 여기라. 여기와 저기가 같을 수 없고, 옳음과 그름이 한데 섞일 수 없으며,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
고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러니까 말이다. 내 안에 저 아이 때문에 속 끓는 심정이 증거였다. 괜히 저 일로, 그 사람 때문에, 이 판국에 그래서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특권, 권세를 주셨으니! 이 일은 곧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므로 나타나는 삶의 증상은 뚜렷하여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내게 두신 몸뚱이라면 그 몸을 가지고, 여기 이 자리 성소를 지키는 자로서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여서 복되다. 더는 믿지 않는 자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세상이 어떠하든 정죄지도 정죄함을 당하지도 않으며,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다만 온전한 사랑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말씀 붙들자. 말씀만으로 서자. 이는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보존하시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두려워할 줄 알기에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결국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 29:42).” 오늘 말씀이 주시는 의미는 하나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46).” 하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이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나? 곧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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