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
출애굽기 30:29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1-2
거룩이란 구별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그리 구별하여 거룩하다 하였다. 이는 저의 모든 생이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만 쓰였으며 그에 소용되는 것으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이 같이 할 수 없고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 119:113).” 그러한데 늘 나는 그러하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하다.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게 두렵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호 10:2).” 주 앞에 설 때에 나는 결코 나의 애씀으로 거룩할 수 없다. 내 마음은 늘 두 주인을 섬기는 종 같아서 하나님이 좋으면서 세상도 좋다. 세상이 좋을수록 하나님께 송구하고 하나님이 좋을수록 세상이 많이 그립다. 이 다툼은 여지없어서 번번이 나는 진다. 본래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초연하고 청빈한 삶이란 그저 허상인가. 얽매이지 않고 산다는 게 실은 불가능한 것 아니겠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물론 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삶은 아닐는지. 모르면 모를까 가르치는 자로 살면서는 숨을 곳이 없다. 오늘 아침, 말씀은 마치 나의 허를 찌른다.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출 30:29).”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거룩한 것으로 구별함이란 오직 한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는 마음이어야 할 터인데.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거룩하여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여져야 할 터인데 그게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아니 되레 나는 자꾸 불가능한 것만 같아 뭘 어찌 하려하면 할수록 악하고 추한 모습만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이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은 하나였으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문득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드는 생각이었다. 성경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게 아니다. 하나님과 악을 견주어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 게 아니었다. 사탄과 하나님을 대등하게 놓고 어느 한쪽을 시시비비 가리는 게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은 이것이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어떠하든지 바른 길은 하나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니다. 마치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게 내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면 그것도 악하다.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모두는 죄인이다. 더 죄인이고 덜 죄인인 건 없다.
보면 온통 진영논리다. 흑백논리다. ‘모 아니면 도’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그 중 하나로 놓고 견주어 선택하려 드는 모든 것은 악하다. 여호수아는 절규하였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모두가 어떠하든지, 그 길은 하나였다.
‘믿든지 안 믿든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믿음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옆 사무실 공사소음에 먼지에 저들이 뿜어대는 담배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러면서 들어앉아 설교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묵상하고 찾아보았던 말씀들이 새로웠다. 우리의 유일한 안목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었다. 전도자는 이를 알았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3).”
내가 연구하고 살펴 얻을 수 있는 지혜나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저 인생은 수고로울 뿐이다. 괴로운 것이니 것도 부질없다. 그럼에도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3-5).” 내가 지금 무얼 바라고 붙들고 씨름하며 관심을 모아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두고 있는 시선이 머문 곳이다. 쓰고 있는 말의 표현이 향하는 곳이다.
늘 싱겁기 그지없어 번번이 넘어지고 또 실패하여 좌절하기 일쑤면서도 그래서 주를 바란다. 나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고 세상과 하나님을 유별하여 섬길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내 안에 늘 두 마음이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요구와 참견을 원하고, 희생하는 마음은 항상 그에 따른 보상과 관여를 꿈꾼다. 그러니까 내 안에 두 마음이 아니라 수십만 개의 마음이 뒤엉켜 있었으니.
말씀을 정리하고 전해야 할 말씀으로 가닥을 잡다보면 내가 먼저 그 말씀에 속수무책이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른 것일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한데 늘 그 이상의 생각으로 나 혼자 쩔쩔매는 꼴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그러나 마음 같지 않은 것에 늘 실망하고 좌절하는 경우라. 나는 나보다 어려운 적은 없다.
아,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이 말씀이 나를 강하게 붙들어 세우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내게서 난 게 아니다. 결코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 난다. 이것만 있으면, 저것만 이뤄지면, 하면서 무얼 바라고 구하지만 그게 다 소용없는 것이어서. 그래놓고는 나의 공로를 내세우기 십상이었으니, 나란 사람이 가장 추하였다.
말씀 앞에 그리 비춰지는 모습에 송구하고 무안한 하루였다. 전날에 아팠던 몸은 좀 나은 듯하고, 괜찮았던 마음은 저 혼자 뿔난 사람마냥 시큰둥해있었고, 시무룩했다가 활짝 개였다가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라. 저들을 이해하고 섬겨야 하는 마음인데 도리어 욕지기가 한데 올라오고, 감사하는 마음이어야 하는데 원망과 저주가 한데 섞여 나오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말 그대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그러니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 말씀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디 숨을 데가 없다. 기어이 나를 솎아 세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하게 하신다. 나는 곤고한 사람일 뿐이다.
말씀을 준비하는 일은 그래서 기이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마음과 마주하게 하신다. 나의 본 모습에 놀라게 하시고 이를 여실히 드러내신다. 부끄러움으로 주 앞에 굴복하게 하신다. 내가 뭘 좀 한다고 여기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경멸하신다. 전도서는 나를 마주하게 하는 데 탁월한 말씀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마치 나의 이러한 수고를 선으로 여기던 마음을 머쓱하게 하신다.
나는 결코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5).” 그러면서 마치 누구보다는 나은 것 같고, 옳고 그름에서 옳은 쪽에 섰다고 자부하고, 이쪽이냐 저쪽이냐에서 이쪽에 선 것으로 여겨 저쪽을 정죄하려 들던 마음을 엄히 경계하셨다. 나는 결코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복종을 배우게 하신다.
이에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1-2).” 오늘 아침, 시편의 간단명료한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나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단 한 시도 살아갈 의미가 없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으니.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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