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전봉석 2019. 2. 2. 07:22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2:34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시편 119:49

 

 

 

그럴 자들은 그렇고 저럴 자들은 저렇다.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 32:9).”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데 그게 늘 나였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24).” 마치 저절로 그리 되는 것처럼 내 안에 숱한 금송아지가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어느새 하나님을 대신한다. 위로가 크다.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더 바라고 구하게 된다. 번번이 낙심하고 실망하기 그지없는데 돌아서면 또 그러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마음이 그렇고 어떤 일에 대한 기대가 그렇다. 심지어 내 안에 이는 여러 감정조차 내가 의지로 다스릴 수 없음을,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왜 그처럼 모질고 엄격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보면 늘 내가 못마땅하니까 지레 남 탓을 하는 까닭이겠다.

 

누가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라 그걸 마주하는 용기라고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날이 아니라 지금이 중요하단 소리로 들린다. 하긴 아브라함에게 장래 일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래는 어떨까? 하는 데 집중했다면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떠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그 때가 언제인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저는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거기가 어디냐가 아니라, 그게 무엇이냐가 아니라, 함께 가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말씀을 붙든 것이다. 믿음의 실체다. 뜬구름 잡는 게 믿음이 아니라,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그런 거 보면 무슨 일이 생기든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구와 가는지는 분명히 확신하는 삶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 ‘동행’과 ‘벗’이 갖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이는 초연한 운명론자가 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그리 되게 두는 회의론자도 아니다. 의지적으로, 말씀을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행이었다. 하나님과 벗된 자의 삶이란 그렇겠다.

 

한데 잠시 안달이 일고 순식간에 두려움이 몰려오자 아론의 말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을 불에 던지니 우리의 신이 되었다.’ 그 열정과 열심으로 사는 우리의 금 고리를 빼내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고 조각하니 자신들의 하나님인 금송아지가 되었다. 이런저런 우리의 모색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든 것이다. 이에 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거기가 어딘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가라 하실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도 떠났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귀하게 다가온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형적인 믿음의 실체가 된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어디냐가 아니었다. ‘왜?’도 아니고 ‘어떻게?’도 아니라, 다만 함께 하실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데 모든 걸 걸었다. 이를 바울은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하는 말씀으로 정의하였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사는 삶이라니!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날에서의 정체성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앞서간 족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저들은 다만 믿음을 따라 갔다. 별 볼 일 없이 죽었다. 약속도 받지 못하였다. 그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외국인으로 거하였다. 그럼에도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의구심이 늘 들면서도 동시에 내 안에도 그와 같은 믿음이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이를 온전히 합당하게 하셨다. 말씀을 따라가는 일은 이래서 놀랍다. ‘이제껏 베푸신 사랑 돌아볼 때, 나 결국 곤란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을 아네.’ 존 뉴턴의 말이다.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잘 안다. 한참 우울하고 시무룩하여 앞날이 걱정되고 두려움이 강하게 엄습하고 있을 때도, 순간 오늘까지 나를 이끄시고 함께 하신 것을 돌아보면 또한 어떻게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인가를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도 이와 같은 마음을 숱하게 겪어내면서도 믿음으로 갔던 게 아닐까? 약속의 씨를 주시지 않아 자기 나름 방도를 모색했고, 외진 곳에서의 두려움을 거짓말로 모면하려 아내를 누이라 속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버려두지 않으셨음을 저는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런 거 보면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부재 때 더욱 강렬하게 느끼고 누리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그리 열심을 다해 알던 주님을 폭풍우 가운데서야 비로소 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2).” 내가 답변하여 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아이에게 또는 친구에게 내가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들려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저들이 처하는 ‘하나님의 부재’가 천만다행일 수 있다. 친구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말로 하나님을 끝내 부정할 때, 그 짙은 어둠 가운데서 곧 아침이 찾아올 것을 확신한다. 얼마나 더 일이 꼬여야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를까? 주식인지 비트코인인지를 하다 1억5천을 날렸고(들은 것만), 두 아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신은 안구에 고관절에 복부 한 가운데 어떤 이물질까지 잡혀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신학까지 한 저의 처는 돈 벌 궁리에 무슨 다단계에 빠져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저의 근황을 듣다보면 그 짙은 어둠이 소망이 되길 기도한다. 기어이 폭풍우 가운데서야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목이 뻣뻣함이라. 좋을 땐 결코 주를 찾지 않는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만 믿음을 따라 죽었음이다. 결과적으로 한심하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볼품없는 실패자의 모습인가. 기어이 성부 하나님의 부재를 성자 하나님도 절규하며 폭풍우 가운데서 죽으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오늘 아침, 저들이 지어 만든 금송아지 사건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녹이고 조각하여 내 나름의 신상을 만들어대고 사는 게 아닌가? 아이에 대한 어떤 기대에서부터 누구에게 바라는 마음에까지. 어떤 일에 대한 희망과 함께 바라는 마음의 속내에서도. 그러다 틀어지면 금세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남 탓을 하고 저에게 엄격하고 단호한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하고 비난하기 일쑤이니. 넘쳐나는 뉴스 기사를 보다가도, 누구 소식을 들으면서도, 어떤 이를 생각하다가도.

 

아, 그래서 나를 자주 부재 속에 두시는 구나. 하나님의 부재에서 임재를 간절히 바라게 하시려고. 약함 중에 강함을, 패배 가운데 승리를, 부재 중에 임재를, 외면하는 가운데서 더욱 크게 들리게 하시려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왜 그러셨는지, 이제 나는 나를 보면 볼수록 알겠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8-29).”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나의 죄악 됨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고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 32:34).” 선포하게 하신다.

 

그러할 때 내가 더욱 주 앞에 겸손히 나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시 119:49).” 기도하며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 거였다. 이에 “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7).”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9).” 결국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24).” 고로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27).” 또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30).”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곧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이로써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