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전봉석 2019. 2. 4. 07:11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출애굽기 34:12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147-148

 

 

말씀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은 신비로운 일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이 내 입을 통해 증거 되는 일 또한 놀랍다. 준비하고 정리하였던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발표되는 것은 아니어도, 그것을 말하게 하시는 이의 주도하심이 새롭다.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시 119:154).”

 

아침 일찍 아이의 문자가 들어왔다. 몇 시까지 갈까요? 시간이 아직 일곱 시도 안 된 시각이었다.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녀석은 온다만다 연락이 없어 애를 태웠다. 서둘러 교회로 갔고 아니나 다를까 아홉 시를 조금 넘겨 아이가 왔다. 한 손에는 비에 젖어 손잡이가 다 뜯어진 김 선물세트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미리 준비해온 십일조 헌금봉투를 성급히 꺼내면서, 해맑게 웃었다. 몸살이 왔는지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이 아이는 늘 나에게 표징이 된다. 한 마음으로 간절할 수 있는 것을 곁에서 직접 보여주는 예이다. 두서없이 장문의 일기를 쓰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혹시 못 올 것 같아서, 아이에게 예배 때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될 때 두어 달 전에 약속했던 녀석이 전역을 하고 시간에 맞춰 왔다. 저 아이는 또한 내게는 상징이라. 한 영혼을 주 안에서 함께 동행한다는 것에 대하여.

 

모든 게 지혜의 소리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잠 1:20).” 그 하나하나가 들려지고 보여진다는 게 은혜였다. 내 안에 수없이 들끓는 안달복달하는 마음은 나로 씨름하게 하지만 씨름하느라 진이 빠질 때쯤 주의 은혜는 예비 되어 있었음을 마주한다. 그와 같은 즐거움에 대하여,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출 34:12).” 내가 나와 다투다 내 안의 것과 타협하는 일을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듣는다.

 

앞서 우울해했던 게 그런 것이었는지도. 너무 더디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홀로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아 낙심이 짓누를 때였다. 말씀을 전하면서 내가 새삼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낀 것은 앞서 그 부재로 인한 서글픔이 더 심했었기 때문일까? 나의 염려와 근심은 먼저 늘 옥죄고 실의에 빠지게 하여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고 해서 이겨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렇지 뭐, 하고 지레짐작으로 마음이 저 혼자 들까불 때 그것이 나에게 올무가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다. 아, 말씀의 터 위에 나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이란 날마다 거듭되는 씨름이겠구나!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주님도 일찍마다 주 앞에 나아가 조용히 주의 말씀을 읖조린 게 그 때문이지 않겠나?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나는 간절함에 대하여 그리 설명하였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것만이라도, 하는.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우리의 간절함을 세상 것으로 바꾸어놓고 사는 이때에 부디 주일성수 하나라도, 주께 드리는 헌금을 준비하는 마음 하나라도, 말씀 앞에 앉는 시간 하나라도.

 

내 안의 나와 바깥의 나는 번번이 싸운다. 서로가 마땅치 않아하고 늘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럴 때 섣불리 언약을 세우는 일은 올무가 될 뿐이다. 곧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이것만이라도’ 하고 붙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 그 사소한 나의 수고는 각오가 되고 각오는 행실이 되며 행실은 습관이 되어 평소를 이끈다.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때론 그것이 강박으로 여겨지고 괜한 광신적인 일로 보인다 해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나는 전역을 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온 아이에게, 또 간절함이 병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아이에게, 우리의 약점이 우리의 가장 강점이 될 수 있다는 데 강조하였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보배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래서 나는 아이의 약점을 사랑한다. 아니 내게 두신 약하디 약한 부분으로 감사한다. 때론 나의 안달복달이 나를 더욱 주 앞에 간절하게 함이다.

 

설날, 낯설어서 어려운 날. (우리 언어가 주는 교훈이 새롭다.) 비가 오는 밤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면서 주의 인도하심이 늘 새롭다는 데 놀랐다. 앞으로 어떨지,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행할지. 또는 나 역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막연하여서 때론 내 안의 내가 타협하려고 할 때,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그와 같은 바람이 더욱 강하고 새 힘을 더하게 하시려는 주 앞의 인자하심을 묵상한다.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그러할 때 그것이 나로 하여금 바른 길 가게 하신다는 것에 대해 더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나의 지혜로는 감당이 안 되고 나의 각오와 다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들이어서. 이것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내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힘에 겨워 번뇌할 따름이라.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근심뿐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오늘 아침, 이 말씀은 내게 그리 들린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나는 잠잠할 따름이라.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주가 하신다. 늘 보면 하나님이 다하신다.

 

누구 하나 오고 안 오고, 저 아이가 어찌 행하고 안 하고. 나는 다만 주가 맡기신 바 나의 곤고함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이루시는 것을 알았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애 3:28).”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저 아이들에게 향하는 마음도 내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내가 내 것이라 여기는 나 자신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잠잠할 것은 주가 메우셨다. 지고 갈 따름이다. 가다 지쳐 힘에 겨울 때도 주가 먼저 아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다만, ‘내가 날이 밝기 전에’ 주 앞에 앉을 따름이고,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그러할 때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 그리하심을, 그에 따른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나는 그 어떤 일보다, 이것 하나만이라도 목숨 걸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갔던 아브라함에게는 그래서 앞날에 일어날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100).” 이는 삶으로 터득한 노인의 지혜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어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이처럼 말씀으로 이끄시고 붙드시고 나로 사로잡히게 하심이 은총이었다. 아이의 병약함이 주께 향한 간절함을 더한다면 그게 은혜였다.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가 주께 아뢰어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는 게 엄연한 축복이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노인처럼 살라고 권하였다. 곧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지난날을 회고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그때마다 채우시고 모자람이 없게 하셨던 ‘만나 항아리’를 날마다 기념하면서. 그릇 행하지 않기 위해서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짚고. 내 어깨에 팔목에 양 미간에 ‘언약의 돌판들’을 새겨.

 

허락하시는 날을 사는 동안에 날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또는 저 영생의 첫 날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이를 아침마다 읊조리며 다시 허락하신 한 날의 생을 다하는 일이라니! 주의 본(本)을 따라 살자. 청년의 시절은 특히 위태로운 시절이어서, 그리 간절하게 증거하고 선포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가 새삼스러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이는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107).” 폭풍우 가운데 들려지는 주의 음성이었다. 결국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13).” 그러므로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