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전봉석 2019. 2. 13. 07:14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레위기 3:6, 16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흠 없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만 그렇듯 위하고 선결하여 중심을 두고 사는 마음이 중요하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이란, 주를 바라며 그 의식을 먼저 하고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그래서 뚜렷하게 느끼고 누릴 수 있는 복이 무엇인지, 생동감 있게 감사할 수 있는 것. 언제나 하나님이 앞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 내가 어찌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 하고 계셨다는 것.

 

늘 보면 마음과 생각은 다르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의연함이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나싶다. 괜찮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졸였던가보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은 답답하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주치의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병원에 들렀다가 약만 받아서 왔다. 오는 길에 혼자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먼 길을 휘적휘적 걷다 어디 부동산에라도 들러 어디 마땅한 곳이 있나 하고 물어보려 하였다. 머리와 마음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하루였다.

 

어디 아파트상가 건물 1층이 두 곳 비었는데 마침 그 가격에 볼 수 있다고 하여 들렀다. 보니 아파트 출구여서 좋긴 한데 종일 볕도 안 들고, 너무 협소하고 궁벽해보여서 순간 서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한데 것도 저이가 잘못 알고 있어서 나에게 말해주었던 배 이상의 월세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두통약을 먹고 잠깐 누웠다가 곤히 잠들었다. 주인 사장이 건너와 자신이 다 처리하였으니 너무 걱정 마시라며 되레 위로를 하고 갔다.

 

내가 저를 걱정한다고 여겼는데 저가 그처럼 마음을 쓰고 있었으니, 이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보면 여실히 감출 수가 없다. 우리는 자꾸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일반화시켜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려하는데 하나님은 매우 치밀하시고 구체적이시다. 하루 이틀 마음이 어지럽던 것이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이 다루고 계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게 뭔지, 어떤 건지,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마음이 어지러운 뒤에 분명해진다. 혼잡하여 혼자 속을 끓이고 애를 태우고 나면 알게 된다. 말은 안 했지만 나에게 의연함이란 확실히 불가능한 게 많다. 이리저리 궁리하고 어쩌면 좋을까, 생각이 많았던 뒤의 일이라. 오히려 싱거울 정도로 하나님은 자연스러우셨다.

 

여타하면 계약 기간도 만료된 지 오래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교회를 빼줬으면 한다고 통보해도 될 거였는데. 저의 배려나 마음 씀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고마웠다. 어쨌든 종교시설이 있어 사업자금으로 융통하던 돈을 몇 천씩이나 갚아야 하고, 것도 일 년에 한 번씩 20%씩 상환해야 하는 일이라 결코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 우리 때문에 어려움 겪기보다 우리가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고 했을 뿐인데 저처럼 본인이 애써주고 수고하여 일을 수습했던 모양이다.

 

잘 처리했습니다. 우선 20% 상환했고요, 다른 문제는 또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되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오히려 저이가 내게 해준 말이 고마울 따름이라. 누가 그렇듯 나서서 신경 쓸까. 이게 확실히,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은연중에 저도 아는 일이었다.

 

그 모친과 외가의 신앙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하여는 안 믿는 자로서도 은연중에 다 아는 일이었다. 오죽하니 저들 속에 ‘알지 못하는 신’까지 모시고 살까?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바로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헛것으로라도 신을 삼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일 텐데. 나는 그저 나에게 맡기신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겠다.

 

은근히 마음을 졸이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혼자 배회하듯 몇 곳 돌아다녔던 게 한나절 전이라. 한 치 앞길을 누가 알겠나. 주인이 와서 그리 안심시키고 당부하고 간 뒤에, 잠결이라서 그랬는지 몽롱하여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자리에 앉아 그저 멍하였다. 공연히 내가 어쩌고 나서서 하려다 실족하기 십상이겠다. 교회 일이라 하고 한 영혼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게 실족의 위험이 있다.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시게끔 하는가가 관건이다.

 

공연한 기대와 열심과 수고가 되레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부쩍 드는 생각이 하나님을 못 기다리는 하나님의 일이 그 어떤 악함보다 악할 수도 있다. 내가 주도하는 하나님의 일이 실은 타락이었다. 그것이 불순종이었다. 교회에 대한 열심도, 한 사람에 대한 희생도, 나름의 착함과 선함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저 돌베개를 베고 잤던 곳이 하나님의 전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바로 내 모습이지 않았나? 괜히 신경 쓰고 또 마음이 어지러워 기웃거리다 돌아와서는 머리가 아파서 약을 먹고 누웠다가는 잠시 잠에 빠졌었다. 주인 사장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는 소리에 비몽사몽 듣자니까,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7).” 딱 그 심정이었다.

 

아차,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나는 다만 내 신을 벗어야 할 뿐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내가 어찌 해보려던 수고와 애씀이 도리어 거룩함을 저버리게 하고 하나님이 거기 계심을 소홀히 여기게 할 수 있다. 내가 다짐하여 읽는 성경과 이를 악 물고 저를 용서하는 마음과 혹시나 싶은 열심으로 또는 그것을 헌신으로 삼아 마치 하나님께 지청구를 하듯.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어쩌면 늘 그렇듯 사는 게 몸에 밴 까닭일 수도 있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자세로 목사니까, 성도니까, 심지어는 은혜를 받았으니까 마치 이를 갚아야 할 부채로 여겨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채권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교회도 이를 묵인하고 도리어 이를 부추겨 그 열심으로 세를 불리고 부흥을 도모하려 하기도 하는 것이니.

 

훗날에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은 거역하고 불신자로 살다 간 것이 아니라, 나름은 주의 이름으로 행하고 열심을 다한 수고와 애씀일 수 있겠다. 그러니 그 날에 황당해할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던 저들의 열심이 저들은 속인 것이다.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나름은 상당히 종교적으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애쓴 인생이었는데 그 모두가 허사일 뿐 도리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섬뜩하다. 두려운 말씀이다. 안 믿고 다른 데 마음을 두고 산 사람은 그 불신앙을 금세 수긍하고 심판을 달게 받을 텐데, 저들은 그 억울함이 더욱 한몫 더해 고통이 두 배이지 않을까? 나의 수고나 나의 애씀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고착이다. 나름 할만큼 했다고 여기는 자기 안주가 그것이겠으나.

 

말씀은 그런 내게 엄히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되레 가만히 있지 못한 죄가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열심이 실은 의심에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이 미덥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해보려던 것이고, 그러느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마음을 두어 널리 이롭게 하는 두루두루 낭만적인 신앙에 도취되어 사는 것이 더욱 황홀할 수 있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하니까 아내는 풋, 하고 웃더니 하나님의 일은 참으로 자연스러울 뿐이라고 놀라워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억지로 되지도 않는다. 그걸 그저 열심을 다한다고 수고하고 애쓰려니까 믿는 자로 사는 게 고달플밖에.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이 가장 어렵다. 믿고 맡기면 되는 일이 제일 안 된다. 거저 주시는 것에 감사하면 되는데 은혜가 제일 비싼 값을 물게 하는 것이다. 언제쯤 나는 의연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어 주 앞에 앉는 일, 말씀을 끌어다 말씀만 붙들고 의뢰하는 것.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그러므로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 두신 날의 수고로 족하다. 이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3).” 이미 풍성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4).”

 

먹지 말라 하시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로움을 주가 담당하셨다. 곧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라.' 우리의 수고하고 애씀이 도리어 주 앞에 나아가게 한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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