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정결하리라

전봉석 2019. 2. 22. 07:08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레위기 12:8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나면서부터 죄악되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본질적으로 세상은 그러하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보다 더 어려운 게 있을까?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

 

살면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때론 고달프고 힘에 겨워,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용쓰고 애써 내가 어찌 선을 추구하려 하지만,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덕지덕지 들러붙는 어떤 슬픔에 대하여.

 

마음이 어렵고 힘든 하루였다. 나로 산다는 게 힘에 부치고 어려웠다. 결국 아내에게 폭발하고 퍼붓고 스스로 혐오스러워 돌아누웠다. 나는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울었다.’ 내 안에 이는 나에 대한 애착이 나를 노예로 삼는다. 헤어 나올 길이 없는 것인가. 뭐라 말을 하면 서로가 피곤하고, 혼자 앓듯 싸안고 있으려니 괴롭기가 한이 없다.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형국이라. 모든 게 서럽고 지친다. 입을 빼물고 돌아누운 내 자신이 송구하고 민망하였다.

 

그러려니 하고 살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도 있으니,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우리의 눈물은 단지 서러움에 흐느끼는 게 아니다. 점점 더 고약해질 세상에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과연 나는 무엇을 붙들고 의지할 것인가. 퍼붓듯 쏘아대는 나의 말이 나의 영혼을 찌르는 소리였다.

 

종종 아이들을 생각하며 이 땅에서 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하면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아니다, 싫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에 대하여는 어찌할 것인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3:7).”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향한 외침이었다. 정작 진노를 진노로 여기지 못하는 세상에 대하여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고.

 

그러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하고 바랄 것인지. 무엇으로도 우리 자신은 위로를 얻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저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를밖에. 새로 누가 들고나고, 어떤 일에서 무슨 일이 파생되고말고. 가만히 우리가 바라는 게 주를 바람이 아닐까.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아이를 낳고 저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어쩌면 나는 아이들이 다녀갈 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들에 대한 애틋함은 그저 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너무 슬퍼하거나 너무 기뻐하거나 하지 않기를. 오늘 여기는 다만 바벨론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주를 바라며 그 뜻에 더욱 주목할 수 있기를. 그러라고 두시는 고초가 아닐까. 혼자 앓는 소릴 낼 뿐이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입을 열어봐야 원망과 서러움뿐.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니 나의 경건은 무엇으로 드러날까?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 나는 말씀 앞에 설 때마다 그럴 가치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 다만 송구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고 오히려 그 속엔 원망과 저주만 가득한 것 같아서.

 

초딩 6학년 올라가는 사내 녀석이 유난히 뒷정리를 잘한다. 아이들이 꺼내다 읽은 성경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정돈하고 남이 흘린 것까지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다. 넌 참 착하다, 예의바르다, 하는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이에게 강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콤플렉스’라고 해서 착하고 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사랑 받을 수 없다는 불안이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냥 둬, 하고 말했더니 아니에요, 하고 아이가 부지런을 떨었다.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며 등짝을 툭툭, 쳐주며 장난을 걸자 아이가 우쭐하고 즐거워한다. 앞으로 아이가 살아야 할 세상은 어떨까? 어떻게 하면 저 아이에게 나의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을까? 알려주어 그 서러움이 결코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마다 다들 안고 사는 고달픔이 있었으니. 죄악된 몸으로 이 땅에 난 것부터가 구원을 필요로 한다. 본질적으로 우린 악하다. 태생이 죄인이다.

 

그런 걸 우리도 본능적으로 또 다들 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19).” 그러니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 그것이 바벨론 강가에서 우리로 시온을 그리며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옆 사무실 노인네가 건너와 뜬금없이 지난 날 이야기를 하였다. 가난했던 시절,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그처럼 힘들었는데 돌아보면 그때의 가난은 모두가 보편적인 것이라. 오히려 요즘 아이들이 불쌍하고 안 됐다며 혀를 끌끌 찼다. 개인 사정이야 어떻던 획일화된 브랜드의 옷과 신발과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고, 터무니없는 비싼 가격에도 부모는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그리 사줘야 하는 현실에 대해.

 

그 집 세 아이가 학원으로 들어가는 돈이 다 합치면 수백만 원이라. 그러니 며느님을 뭐라 한들 저도 불안한 것이고, 굳이 학원으로 내몰려야 하는 손주들을 뭐라 한들 저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실정이니. 도합 6백은 생활비로 드는 것 같다며 혀를 끌끌 찼다. 어쩐다? 누굴 원망하고 뭐라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차라리 내남없이 가난하였던 시절이 오히려 나았던 게 아닌가하고 한탄하였다. 공납금을 매 학기마다 밀려 교무실에 불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그 서러움을 겪으면서도, 모두 그래서. 다들 없이 살던 시절이라 그때가 낫다는 소릴 한참을 하고 또 하였던 것이다.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며 왜 저런 소릴 내게 와서 하는 것일까 생각하였다. 저로 하여금 저런 이야기를 하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무슨 말로 저를 위로하고 붙들어주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저가 돌아가고 난 뒤 정작 저가 건너와 늘어놓았던 인생살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것이었구나, 생각하였다. 모두가 병들었다. 아무도 아프단 소릴 안 한다. 참 이상한 세상이다. 행여 누구에게 그런 소릴 하면 그것이 책잡힐 소리여서.

 

우리가 주를 바라는 까닭은 우리의 잃어버린 생명 때문이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날 때부터 눈 멀고 귀 막힌 가운데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예전의 나와는 다른 것이다. 분리된 자아가 나의 부끄러움을 사무치게 하여 주 앞에 나아오게 한다.

 

어찌할꼬! 말씀이란 그런 것이어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그렇듯 한탄해 하고 서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복이기는 하겠다. 우리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4).” 서로의 부끄러움까지도 주 앞에 드러내어 용서를 구한다. 서로의 위로가 관심이 마음 씀이 필요하다. 내가 저 노인의 푸념을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뭐라 해도 들을 수 없는 저의 막힌 귀를 향해.

 

그러므로 나는 다만 시온을 향해 눈물 흘리는 것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이는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다만 주 앞에 앉아,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8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