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전봉석 2019. 3. 5. 07:25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3:43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시편 148:13

 

 

우리는 삶을 찾아가는 구도자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하다. 이미 찾은 사람들이다. ‘주님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이와 같이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서 평안을 얻는다. 다른 무엇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하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여러 번 되뇌며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미세먼지로 뿌연 3월의 첫 번째 월요일이었다.

 

누가 인도로 해서 어디어디로 여행을 간다기에, 그 이유가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다. 문득 나에게도 떠오르는 누가 있었다. 저는 기어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할 때 나를 극구 만류하며 심지어는 나와 같은 케이스(?)’인 자신의 친구에게까지 연락을 하여 나를 설득하게 하였다. 그 또한 목사의 아들이었고, 젊은 날 여러 종교를 섭렵하다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기어이 강원도 어디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암자를 짓고 수도승으로 살고 있었다. 며칠 전 누구는 오랜만에 전화하여 자신의 남은 제 2의 생을 새로운 비전을 품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유독 내 주위에는 그런 류의 삶이 여럿 있었다. 젊은 날 김성동의 <만다라>를 읽고,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고 한참씩 멀리까지 운전을 하고 나갔던 기억도 났다. 뿌옇게 미세먼지로 온통 도시가 붉게 물든 월요일 날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이 말씀에 붙들려 시선을 놓곤 하였다.

 

자신을 찾아 떠난다는 누구 이야기와 결국은 혼합된 종교의 수도승이 된 선생의 친구 이야기와 뜬금없이 선교사를 운운하며 미얀마로 가겠다는 누구 이야기를 생각하며, 말씀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뭐든 해야 할 것 같고, 그 타는 목마름 같은 영혼의 허기를 위해 배회하는 이들은 너무 복잡하다. 번잡스럽고 늘 무언가를 쫓기듯 바쁜 마르다들이다. 그런 저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우리의 천연덕스런 인사는 바쁘시죠? 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고 바쁜 게 좋은 것이라 여겨, 특히 젊을 땐 바빠야 한다는 소릴 개똥철학처럼 읊조리곤 한다. 우리 안의 마르다는 여전히 분주하다. 산만하고 안달복달 더 늦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고 재촉하고 바쁜 일상을 훈장처럼 자부하면서 산다. 점심시간을 틈타 아들 녀석이 전화를 주었다. 점심은 먹었는지, 몸은 좀 어떤지 물었다. 나야 늘.

 

6월로 계약기간이 끝나 귀국을 하게 될지, 그렇게 몇 개월 모은 돈으로 호주나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올지, 한국에 들어와 회계업무 관련 시험을 준비할지, 외국인 회사에 지원하여 직장을 구할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참 생각이 많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은 녀석에게 한 가지 만으로 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것을 상기시켰다. 여태 그런 것처럼 주가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단 한 가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결코 무엇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맡기시고 더하시는 날을 순종하는 것이다. 때론 그 일이 전망이 있고 모두가 좋다 해도 하나님이 막으시고 틀어버리는 것도 있다. 나는 녀석이 사업을 하네 장사를 하네 하면서 누가 저의 스폰서가 되어 투자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극심한 위경련이 올 정도로 반대였다. 사람을 보고 사람의 도움으로 사람에 의해 하는 일은 그 끝이 뻔하다.

 

나는 이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하나님만 바라자. 어디로 어떻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으나, 말씀만 의지하여 나아갔던 아브라함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모범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우습게 여기고 하찮게 여긴다 해도 묵묵히 명령을 따라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생은 규범이 된다. 강권하심으로 이끌어 주가 세우시는 모세를 보았다. 사고뭉치처럼 번번이 잘못된 길을 갔으나 그때마다 돌이켜 주의 길을 가게 하신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다윗이지 않던가.

 

그 모두의 공통점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8-39).”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일이다. 이로써 성령의 선물을 받는데, 이는 약속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음으로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이라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당장 서너 달 뒤에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녀석은 불안했던가? 워홀을 가든, 어떤 시험 준비를 하든, 어디에 새로 취직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게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게 다다. 그저 단순하였다. 약속의 땅 거기가 어떤 곳일지. 그럼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그러려면 어떤 일을 하는 게 나을지. 무얼 준비해야 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에게도 왜 그런 경우의 수를 따지고 마음이 조급하며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겠나. 가뭄이 오자 남방으로 옮기다 애굽으로 내려갔고,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님의 약속은 묘연하여 스스로 강구한 게 몸종으로 후손을 삼으려 하였고, 더는 여종 하갈의 몸에서 씨를 보기도 하였으니.

 

사람으로 사는 일이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애들은 애들이어서 바쁘고 청년의 때는 청년이어서 바쁘고 노년에 이르러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다지느라 바쁘고. 우리 안에 늘상 바쁜 마르다가 항변한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10:40).”

 

저마다 영생을 사모하고 이를 찾아 헤매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어떻게 하든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당장 오늘 죽어야 한대도! 내가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만 남는다.

 

모든 게 때가 있다.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내 오랜 벗들도 다 허사라. ‘나는 한 권의 책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다는 존 웨슬리의 고백처럼, 말씀뿐이다. 하나님과 나의 일이다. 죽음이 이르러 더는 무엇도 도움이 될 수 없으나 말씀으로 온전히 단순하여지는 연습이 필요하였다. 계획도 모든 수고도 단순명료할 뿐이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3:43).”

 

오늘 말씀을 그리 명료하게 듣는다. 나를 구원하신 까닭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뿐이다. 나를 통해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선을 도모하여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사람이 먼저인 것을 구현하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영혼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148:13).”

 

어쩌고저쩌고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들먹이며 선을 찾는 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내게 더하시는 한 날의 단순함을 감사하였다. 굳이 애쓰지 않고 그리 여겨져 그리 행하는 노아의 실천과 무모하기까지 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자신을 저주하고 욕하며 따라오는 시므이의 소행까지도 하나님이 그리 허락하신 것으로 여기는 다윗의 순진함과 옥에 갇혀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날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 하는 확신과 믿음을 더하였던 바울의 깊은 묵상과...

 

저들 믿음의 영웅들을 어째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는지. 아들과 짧게 통화하면서 다 들려주고 싶었고, 혼자 있으며 때론 무료하고 우울하여 헐떡거리는 내게도 알려주면서, 어디로 선을 찾아 떠나는 누구를, 또 어떤 수도승과 곧 선교지로 떠날 것 같은 누구에게.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148: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