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전봉석 2019. 3. 6. 06:47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레위기 24:15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편 149:6

 

 

거짓도 보면 다 참인 것 같다. 그럴듯하다. 가짜가 더 진짜 같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 믿음도 신앙도 선도 의도, 모든 게 가짜일 수 있다. 시쳇말로 가짜뉴스가 더 진짜처럼 여겨지는 판국에 저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러려면 단 한 가지 저들이 못하는 게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7).” 찬송은 순환하는 공기 같아서 날마다 더하여지는 구원 받는 사람으로 새롭다. 그럴 수 있는 게 구원 받는즉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고 눈이 열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들리고 느껴지면서, 자신의 무지몽매함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구원 받은 이의 특징은 회개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12).” 당황스러워 나타나는 증상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그때에 가르침을 받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1).”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

 

성령을 선물로 받는, 구원을 받고 있는 삶이 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39).” 우리의 구원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확연히 다른 삶으로 나타난다. 즉 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놓여난다. 부끄러워하며 아무도 모르는 일까지도 회개한다. 더는 그것으로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얻으려하지 않는다. 그랬던 자신을 혐오한다. 이 땅의 즐거움에 매이지 않는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새로운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것을 사모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14:2).” 결국 내 안에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이 놀라운 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은혜이고 긍휼이고 자비하심이다. 그런 우리는 찬양한다. 주님만으로 만족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이다(1:46-47).

 

결론은 찬송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저는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심을 깨닫고 느끼고 누린다(68).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이제는 잘 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가짜는 설 수 없다. 가짜로 위장할 수 없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전에는 내가 어떠했는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3-5).” 이와 같은 말씀은 날마다 새롭고 다시 되새길수록 놀란다. 왜냐하면 여전히 내 안에 이는 예전의 나는 이제 새로워진 나로 끝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한데 이 일을 내가 한 것이었으면 포기하고 말 텐데,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실행하고 계시며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그 하나님의 큰 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2:11).”

 

결국 창조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이는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것이다(딤후 1:1). 결국 하나님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 찬송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가짜는 찬송하지 못한다. 사탄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어도 찬송은 못한다. 신기하지? 물론 찬송으로 위장할 수는 있다.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하는 식으로!

 

며칠째 해를 보지 못하고 뿌연 미세먼지로 인해 도시는 우울하였다. 꼼짝 없이 들어앉아 그 안에서 기동하는 게 다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 설교집을 읽고 있을 뿐인데, 이를 같이 성경 공부하는 아이에게 들려줄 생각으로 메모를 하였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처럼 놀라웠다. 성경은 그렇게 볼 때마다 새롭다. 전혀 다른 언어를 접하는 것처럼 신선하다.

 

오늘 말씀은 무거우면서 진중하게 들린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24:15).” 결국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20).” 자신이 받은 대로 그대로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나쁜 어조로 읽으면 복수의 언어 같지만 이보다 새로운 은혜의 언어는 없다.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입으면 상처로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된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149:6).” 이 언어는 두 날 가진 칼 같다. 감사와 저주가 같이 있다. 이 일을 어찌할꼬?! 할 때 누구는 주께 나아와 회개하고, 누구는 이를 갊이 더할 뿐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곧 오늘 내게 두시는 열등감이 열등감에 빠진 이를 돌보게 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6).” 우리의 찬송은 이 모든 게 주가 이루심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65: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71:19).” 주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지는 것이다.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시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149: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