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레위기 24:15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시편 149:6
거짓도 보면 다 참인 것 같다. 그럴듯하다. 가짜가 더 진짜 같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믿음도 신앙도 선도 의도, 모든 게 가짜일 수 있다. 시쳇말로 ‘가짜뉴스’가 더 진짜처럼 여겨지는 판국에 저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러려면 단 한 가지 저들이 못하는 게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찬송은 순환하는 공기 같아서 날마다 더하여지는 구원 받는 사람으로 새롭다. 그럴 수 있는 게 ‘구원 받는’ 즉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고 눈이 열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 들리고 느껴지면서, 자신의 무지몽매함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서 구원 받은 이의 특징은 회개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12).” 당황스러워 나타나는 증상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37).” 그때에 가르침을 받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1).” 곧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
성령을 선물로 받는, 구원을 받고 있는 삶이 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39).” 우리의 구원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확연히 다른 삶으로 나타난다. 즉 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놓여난다. 부끄러워하며 아무도 모르는 일까지도 회개한다. 더는 그것으로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즐거움을 얻으려하지 않는다. 그랬던 자신을 혐오한다. 이 땅의 즐거움에 매이지 않는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새로운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것을 사모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결국 내 안에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이 놀라운 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은혜이고 긍휼이고 자비하심이다. 그런 우리는 찬양한다. 주님만으로 만족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이다(눅 1:46-47).
결론은 찬송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저는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심을 깨닫고 느끼고 누린다(68).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이제는 잘 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가짜는 설 수 없다. 가짜로 위장할 수 없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전에는 내가 어떠했는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3-5).” 이와 같은 말씀은 날마다 새롭고 다시 되새길수록 놀란다. 왜냐하면 여전히 내 안에 이는 예전의 나는 이제 새로워진 나로 끝없이 다투기 때문이다.
한데 이 일을 내가 한 것이었으면 포기하고 말 텐데,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실행하고 계시며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곧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그 하나님의 큰 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결국 창조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이는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것이다(딤후 1:1). 결국 하나님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 찬송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가짜는 찬송하지 못한다. 사탄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어도 찬송은 못한다. 신기하지? 물론 찬송으로 위장할 수는 있다.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하는 식으로!
며칠째 해를 보지 못하고 뿌연 미세먼지로 인해 도시는 우울하였다. 꼼짝 없이 들어앉아 그 안에서 기동하는 게 다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 설교집을 읽고 있을 뿐인데, 이를 같이 성경 공부하는 아이에게 들려줄 생각으로 메모를 하였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처럼 놀라웠다. 성경은 그렇게 볼 때마다 새롭다. 전혀 다른 언어를 접하는 것처럼 신선하다.
오늘 말씀은 무거우면서 진중하게 들린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레 24:15).” 결국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20).” 자신이 받은 대로 그대로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나쁜 어조로 읽으면 복수의 언어 같지만 이보다 새로운 은혜의 언어는 없다.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입으면 상처로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된다. 곧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시 149:6).” 이 언어는 두 날 가진 칼 같다. 감사와 저주가 같이 있다. 이 일을 어찌할꼬?! 할 때 누구는 주께 나아와 회개하고, 누구는 이를 갊이 더할 뿐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곧 오늘 내게 두시는 열등감이 열등감에 빠진 이를 돌보게 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우리의 찬송은 이 모든 게 주가 이루심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71:19).” 주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지는 것이다.
이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시니!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 있는 사람은 (0) | 2019.03.08 |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0) | 2019.03.07 |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0) | 2019.03.05 |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0) | 2019.03.04 |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0) | 2019.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