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19. 3. 7. 07:04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5:17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아침마다 아이에게 성경구절을 보낸다. 직장을 다니고부터 피곤하다는 이유로 말씀을 옮겨 적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아이의 반응은 늘 고전적이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좋아요. 예배했어요. 하는 식으로 다양하다. 이 같이 누구에게 말씀 구절을 적어주면 그런가보다 하고 만다. 대꾸가 없다. 구구절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땐 열을 올리다가도 말씀을 적어 보내면 마치 대화를 정리하는 것처럼 끝난다.

 

말씀 앞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가. 읽고 듣고 이 일을 어찌할꼬!’ 하고 마음에 찔려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는 일이라니! 아이는 성경 한두 구절을 읽고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없으나 찬송했어요. 예배했어요. 하는 표현으로 답을 할 때는 나도 다시 그 구절의 말씀을 읽어보게 된다.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25:23).” 하는 오늘 말씀이 새롭다.

 

이 땅을 지나는 동안 다만 우리는 거류민으로서 우리를 주의 동거자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7).” 나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55).” 내가 주의 소유라는 사실에 마음은 안정을 얻는다.

 

살아있는 동안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43).” 하시는 말씀으로 족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이고 그래도 되는 사이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150:6).” 말씀으로 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가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자연스럽게 낫지만, 그처럼 낫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하고 시설이 좋은 의사와 병원이라 해도 우리를 치료하는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급하면 누구든 기적을 바라지만 하나님께 있어 기적은 여러 다양한 손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곧 기적이라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여전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특이하고 놀라워, 자연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새롭다. 그런데 이를 좇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누가 어떻다는 말에 그 현상만 보고 놀라워하는 일은 면구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셨고 행하셨다. 누가는 이를 먼저 언급하였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1:1).” 그런데 허다한 사람들은 저가 행하신 기적만을 좇았다. 눈 멀고 다리 절고 앉은뱅이에 문둥병자들이 낫는 것에 혈안이 되어 주 목적을 달리 두고 예수를 따른 사람들. 저들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외쳤다. 그러던 저들이 말씀 앞에 섰을 때, 성령이 임하심으로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며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목적은 엄연하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죄의 상태에서 시작하였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날 때부터 죄인이라. 복음의 전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말씀은 이를 마주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반응이 여느 온전하다고 여기는 훌륭한 이들보다 귀하다. 예배했어요!

 

적어 보내준 서너 구절의 말씀을 읽고 그와 같이 맨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노년으로 접어든 부모님의 건강이 늘 관심이라. 아버지가 이번에 무슨 검사를 하였고, 치매로 갈 소지가 있는 어떤 결과를 두고, 누구보다 곁에서 늘 지켜보면서 누나가 노심초사하다 빌립보서 44-7절 말씀을 묵상하고 크게 위로를 얻으며 마음이 평안하여졌다고 하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경을 끌어다 그 구절을 천천히 읽을 때, 아이의 반응이 떠올랐다. 예배했어요. 좋아요. 하는 그 단순하면서 명료한 반응이 이런 것이겠구나. 걱정이 앞서고 어떤 우려와 심려가 떠나질 않는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 기뻐할 상황이 아닌데도 앞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염려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아뢸 수 있어서이다. 그리하면, 지키신다. 무엇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시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것이 된다. 다그쳐 벌어진 일은 나를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안정제를 먹어야 할 상황으로 몰고 가지만,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그러니까 내 마음과 생각도 실은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마음과 생각에 대하여는 뭐라 진술하기조차 지겹다. 늘 같은 죄를 되풀이하는 꼴이라, 뚱하니 의기소침하고 화난 사람처럼 굴면서 늘 입을 꾹 다물고 있기 일쑤인데!

 

그 마음과 생각을 주가 지키신다니! 나는 아이의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정신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 장황하고 적절하지 못해 맥락에 맞지 않는 표현으로 사람들은 꺼려하고 심지어 정신지체장애판정을 내렸지만, 우리들 가운데 가장 온전하고 정신이 맑은 친구가 아닐까? 같이 읽은 성경구절을 두고 누군 아무런 대꾸가 없고, 그것으로 대화는 종결되지만 아이의 답변, 예배했어요. 하는 말을 나는 그처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형제들 방에 아버지 상태를 알리고 이런저런 우려와 노파심의 글들이 올라오는 가운데, 누나가 큰 위로를 받았다는 성경구절을 끌어다 다시 읽으면서, 예배했어요! 하는 말의 진정성을 배우게 된 것이다. 예배란 그렇듯 주를 찬송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에서 어그러지면 어떤 기적이든 기적을 바라지만 정작 그 가운데서 우리는 거류민으로 지나는 길일뿐인데 주께서 동거자로 함께 하시는 게, 그리 여겨지고 느껴지는 게 예배다.

 

잠깐 주일에 또는 특정한 시간에 참예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좋아요. 하는 단순한 말과 함께 날마다 매순간 동거자로 예배하는! 그 마음에 찔려 또는 감동하여 우리가 이제 어찌할꼬! 하는 게 예배다. 그저 무덤덤하니 수동적으로 듣고 마는 소리, 읽고 마는 구절이 아니라 멈춰 서게 하고 그 마음에 찔려, 자신들이 모르고 행했던 알고 행했던 지난날의 죄의 과정을 주께 고하여 아뢰는 표현으로의, 예배했어요. 아이의 대꾸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11:7).” 아무리 애써보고 다짐하고 열심을 다해보아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하심은 결국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으로 여실히 알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결국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일은 인위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주 안에서. 그게 내가 모색하는 평강이고 위로고 위안이라면 할 말 없지만, ‘하나님의 평강이라면 별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이해와 굳은 다짐이 이뤄내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곧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결국 우리가 붙들 것은 말씀뿐이라는 것을. 그게 그렇게 가능할 수 있는 것도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저 아이의 저런 표현이 단지 지능장애로 인한 표현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저 이이의 저런 표현, 예배했어요. 하는 이 갑잡스런, 맥락상 맞지 않는 표현이 실은 늘 스스로 유의미하다고 여기고 자칭 똑똑하고 온전하다고 여기는 우리들보다 온전한 거였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평강’은 내가 애쓴다고 애써 얻는 게 아닐 거였다.

 

다만 우리는 어디에 있든, 거기는 주의 성소라. 거류민과 동거하시는 이의 장소라면,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50:1).” 어느새 또 시편을 다시 한 번 한 장씩 읽어 다섯 달을 마치면서, 그 끝은 시작과 같이 찬양으로 이어졌다. 결국 찬양이란, 복 있는 사람으로서 오직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이는 우리의 호흡이 있는 동안의 증거다. 고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150: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