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전봉석 2019. 3. 23. 06:56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수기 14: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불신앙의 극치를 보여주는 본문이다. 얼마나 더 이적을 보고 기사를 행해야 믿을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4:11).” 아브라함이 말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1).”

 

안 믿는 덴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수시로 드는 불안이나 원망이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이겨내야 할 일이겠으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데는 백약이 무효이겠다. 그러니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14:34).” 스스로 자기 죄악을 담당하며 산다는 게 참.

 

말씀 앞에 앉아 생각이 많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까지 주가 그리 하게 하지 않으시면 것도 임의으로 할 수 없는 것일 텐데, 그러니 오늘도 기도를 배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16:1-2).” 다만 주께 피할 뿐이다.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설교 원고를 끝내고 소파에 누워 허리를 지지다가 갑자기 답답하여 차를 몰고 나갔다. 그대로 어디 멀리까지 달리고 싶었다. 마음만 그렇지, 늘 가던 길로 가다 저수지 근처에서 도로 돌려서 돌아왔다. 다저녁에 아이는 뜬금없이 복싱을 하겠다며 뭐라 할까봐 대꾸도 없이 끊었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수는 없고, 안 된다고 하니 그게 또 속상한 것일 테고. 그러니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이 어디 저들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겠나. 나야말로 날마다 전쟁이 아닌가.

 

한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를 만날 때 어찌 전개되고 흩어져 새로운 이야기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여실히 나로 그 증거를 보는 것이다. 누구 이야기 할 거 없다. 내 안의 싸움이 저 아이의 다툼일 테고, 저 아이의 말 못할 갈등이 억압당함으로 지지받지 못한 감정이 가라앉았다가 병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같이 공장에서 일하는 형이 복싱을 한다니까 덩달아 같이 해보고 싶은 것인데, 그러자니 몸도 마음도 그다지 여의치 못한 것이고. 그에 따른 좌절은 상대를 향한 원망으로 바뀐다.

 

마비된 영혼을 향해 우리의 대책은 하나뿐이다. 먼저 저를 주목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를 보라.’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3:4).” 그럴 때 그가 어떤 이유로든 바라봐야 하고,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 이에 그 처방이 일어난다. 곧 우리에겐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이름이 있다. 천하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6).” 하고 저를 잡아 일으킨다. 그때 저들의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모욕감을 느끼고 그 손을 뿌리치며 거부할 수도 있고,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여겨 신세한탄을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7).” 기어이 잡아 일으킬 때, 발목이 큰 힘을 얻었다.

 

40여 년 앉은뱅이로 살던 이다. 마비된 지 오래다. 그런 그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 이 놀라운 역사가 먼저는 나에게서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결코 내가 주를 찬양하고 누구에게 전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며 살던 젊은 날이었다. 친구와 선생으로 마비된 영혼으로 버티지 않았던가. 보다 즉각적이고 바로 답이 오는 저들과의 어울림이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좋았었다.

 

더는 꼼짝도 못할 지점에서 그처럼 늘 의지가 되고 지지를 보내던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저들 또한 알면서도 거리를 두는 그 지점에서 오도 가도 못할 때, 그처럼 무시하고 별 거 아닐 줄 알았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기어이 나를 일으켜 세우셨던. 나는 나와 상관없다고 여기던 말씀이 어느새 내 가슴에 잘 박힌 못과 같이 조각난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안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12:11).”

 

왜 이처럼 이와 같은 말씀이 나를 채찍하고 잘 박힌 못 같이 붙드시는지. 그 은혜를 놀라워할 따름이다. 순간 아이에게 느끼는 어떤 서운함은 여전히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불쾌함 같은 감정이 먼저 스치더니 이내 저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동정하는 마음이 들어오는 걸 느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던 느낌이 느껴지면서 저 아이의 느낌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시는 것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선히 쓰이는 일이었으니.

 

그리 말하는 베드로도 저가 잡히시던 날 저를 부인하였고, 저가 죽으시는 날 저를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갔던 자이다.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잘 박힌 못과 같이. 부활의 예수님은 찾아오셨고 그저 흘려들은 줄 알았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 15:35).” 참 어리석을 따름이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36).”

 

하다못해 좀 전에 먹은 음식들도 본래의 것이 죽어서야 새로 살아난 것들이었으니.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37).” 말씀은 오묘할 따름이다. 어원을 찾고 누가 연구한 것을 다시 들여다본다고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 모두가 내 이야기 속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박혀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칼뱅이 그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이구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설득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나를 다 이해할 수 없듯이 내가 저 아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누굴 설득하여 돌이켜 주 앞에 나오게 할 수 있겠나? 종종 우리의 학벌이 또는 어떤 훌륭한 업적이 사람들을 집중시켜 모이게도 하는 것이겠지만, 그 이야기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교회를 나가면서 저의 담임 목사의 남다른 이력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저의 사는 모습을 두둔하며 그 특이하고 남다른 점을 존경하며 그와 같이 동행하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결국 그것까지도 썩어지고 죽어져 오로지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남아야 하는 것이다. 굳이 내세워 남다른 이적과 기사를 붙들고 서는 덴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그 결정적인 예가 되지 않나.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 너무하다. 여기까지 와서 이 또 무슨 작태인지 모르겠다. 도로 애굽으로 돌아가자니.

 

오죽하니 모세가 저들 앞에 엎드렸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14:5).” 누구랄 거 없이 나 자신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그 불신앙의 고비마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살 길이 없는 것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은 후에 도로 누워버리는 똥구덩이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모든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고 보았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러니 그 글자가 잘 새겨지기까지, 정을 때려 돌판 위를 몇 번이나 쪼아야 하는 것일까? 잘 박힌 못이 그 자리에 곧게 박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치질이 필요한 것일까?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을 담당해야 한다는 말씀이 서럽게도 읽혀진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14:34).”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이내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몫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이것까지도 없이 해주실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는 수밖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나를 지켜 주소서. 슬픔이 슬픔으로, 괴로움이 괴로움으로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