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전봉석 2019. 3. 21. 07:20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민수기 12:3, 7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편 14:6

 

 

하나님은 모세를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온유하다고 보셨다.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다른 허튼 데 마음 쓰며 기웃거려 열심을 다한 인물이 아니라는 소리다. 열심히는 아론도 있었고 미리암도 있었지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 하고 인정하시는 데서 온유함의 근거는 하나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7).”

 

곧 저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모세가 주의, ‘내 온 집에충성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충성으로 치면 또한 아론과 미리암도 못지않았을 텐데. 나는 그 근거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가름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여기서 가난함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그리스도인의 특징 가운데 첫 번째가 그 심령이 가난한 것을 꼽아주셨다. 주밖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가난이다. 어떤 열심도 나름의 수고와 애씀도 아닌, 그것의 증거로 나타나는 특징이 애통함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그리 원하고 또 바라는 데도 그렇지 못한 자신을 마주하면서 드는 통회와 자복을 애통으로 이해한다.

 

그러니 마땅히 저는 온유할 수밖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엄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의 온유함과 같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31:2).” 그래서 저는 애쓰지 않는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더하지 않는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이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모세는 주의 전에 충성하였다. 그게 복인 것을 아는 일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65:4).” 이것으로 복인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하지 못했다. 누가 왔다.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점심을 같이 먹으려고 와서, 그렇게 혼자 있는 나에게 뭐라도 해야 할 텐데, 하고 염려하고 갔다.

 

복도에서 누굴 만났다. 저는 요즘 여러 교회와 연합하여 무슨 세미나에 어떤 일을 도모하느라 바빴다. 바쁘시네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바쁜 걸 숨기지 않고 훈장으로 여기는 듯하였다. 무얼 배우고 가르치려고 어디서 무슨 모임을 새로 만들고 돌아가면서! 긴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짐작이 되었다. 하필 전날에 엘리베이터에서 저의 사모와 막내딸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심통이 나서 엄마 품에서 칭얼거렸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덩달아 늦게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며 집에 가자고 보채는 거였다.

 

일련의 이런저런 열심들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는데 마치 나 혼자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온 누가 내 시간을 물었다. 목요일 하루만 오후께 아이들이 복작거리고, 토요일에 한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하고 놀다 가고, 금요일은 설교원고 작성하고, 주일이면 같이 예배드리고. 월 화 수는 혼자 노네? 하고 나는 그리 답하였다. 그걸 논다 그래? 성경연구하고 집필 한다 그래야지! 하고 누가 놀리듯 말하였다.

 

그런데 그리 걸맞게 또 뭘 그렇게 대단히 하는 건 아니라서. 그저 쉬엄쉬엄 로이드 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집을 읽고, 설교 원고 본문을 정해 옥스퍼드 주석을 찾아 읽고는 성경구절을 메모해두고. 서성이다 누웠다 앉았다 그야말로 빈둥거리는 사람일 뿐인데. 나는 오늘 말씀이 내 것이기를 시샘한다. ‘이 사람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소릴 듣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혼자 웃는다. 부끄러운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저들,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꿈꾸기도 하고, 정작 그런 일에는 나서지도 않으면서. 그래서 은근히 저들에 대한 시샘도 있다는 걸 고백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종 이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하는 말씀을 듣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핑, 돈다. 너무 하는 게 없으면서 어딜 감히 충성을 운운하며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나의 애통함은 정작 남을 향한 게 아니라 내가 그만하지 못하다는 데서 부끄러운 것이다. 그럼 그렇게 순수하던가! 누가 어떤 일로 열심이고 같이 열심을 다하는 걸 보면서 뚱한 심정으로 평가하고 무시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럴 거면 사모와 어린 딸애는 일찍 돌려보내지 왜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애를 힘들 게 하는 거야! 뭘 그렇게 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답시고 유난을 떠는 거야! 하는 식의 고약한 마음이 내재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 다른 날은 뭐해? 하고 누가 물었을 때, 혼자 놀지 뭐! 하고 대답하는 이 어줍고 한심한 위인이 내 종 이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니하며 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런데 저녁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릴 때, 혹시 선생님 가정예배 드릴 시간인가 하고 망설였죠! 하는 어제 한 녀석의 첫 마디가 인상적으로 남았던 건, 어찌 그 시간을 알고 있었다? 아내가 기도 중에 날마다 교회를 지키는 나에게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위하여 기도해줄 때 마음이 뭉클했다.

 

교회를 지킨다. 그 자리에 있다. 여전하다. 뭐 해? 하고 누가 물으면 그렇지, 내가 뭘 하겠어?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 이를 감히 충성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없으면서 거기 있는 것. 다른 무엇을 도모하기 전에, 다른 수를 내기보다 그냥 그렇지 뭐! 여전히 거기에 있는 나를 보고, “이 사람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왜냐하면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이런 나의 마음을 가난한 것으로 비유해도 좋겠다. 하면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는 오늘 말씀은 같이 이어져서 나의 위로가 되시는 것이다. 난 정말 잘 모르겠다. 뭘 하자니 몸은 아프고 마음은 저 혼자 불안해하고, 그렇듯 꼼짝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가 또한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으로 나는 성경을 읽고 누구의 강해집을 읽고 밑줄 긋고 인용 성구를 옮겨 적고, 이번 주일 설교 본문으로 잡고, 인용하고 풀어서.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장처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그러게 난 잘 모르겠다. 이게 맞는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다만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고 부르실 때 내가 돌아보게 된다는 것은 복이다. ‘이것들을 피하고에서 이것들이라면, 한 마디로 돈 되는 일을 하라는 소리에 대해서인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그게 뭔지 알 것 같다. 누군 결국 목회를 접었다. 선교를 운운하지만 그쪽에 무얼 연결하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것이다. 누구는 교회가 안 되니까(?) 다른 모색 중 하나로 연합을 하고 이벤트를 만들고 저들 일상의 일거리를 교회가 돕는(?) 일에 같이 뛰어 들어, 내가 봐도 목사가 너무 바쁘다! 전에 한 번 차를 마시러 왔을 때 슬쩍 그런 속엔 얘길 해주었더니 그 뒤로 차 마시러 오지도 않는다.

 

그러게. 이럴 때면 나는 빙충맞지만 정말 잘 모르겠다. 교회가 성도들 사업에 관여하고 그 일(장사든 다단계든 무슨 사업이든)에 보증이 되고 판을 벌여주고 덩달아 어떤 수익을 좇는 따위의 일에 대해서는, 난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뭐라 하면 욕으로 들으니 할 말은 없지만. 넌지시 나는 저에게 우린 마치 주방장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저 말씀으로 식재료를 찾고 그걸 조리하여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에게 먹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나싶어서.

 

오늘 말씀은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오직 나의 피난처 되시는, ‘젖 뗀 아이는 자기 의지로 엄마 품에 안겨 평온을 얻는다. 감당하지 못할 말들과 일을 꾀하지 않는다. 정치를 교회로 끌어들여 마치 교회가 저를 지지하고 어느 정당을 두둔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인 것처럼 버젓이 정치행보를 보이는 누구를 나는 혐오한다. 마치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그 길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의무인 것처럼 떠벌여대는. 그리 휩쓸려 강단을 내주고 동조하는 자칭 보수 원로 목사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우리는 복음을 그리 배우지 않았다. 교회가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뜻을 다하는, 아론과 미리암의 열심으로는 곤란하다. 저들이 말한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2:2).” 가장 두려운 것은 차라리 안 믿고 열심을 다하지 않는 누구보다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열심으로 도취되어 길길이 날 뛰는 정치가와 장사꾼이 나는 두렵다. 저들 눈엔 하나님도 출세의 도구일 뿐이다. 그의 성전은 자신을 돕고 위하는 데 쓰여야 한다. 그 열심을 충성이라 한다면.

 

모르겠다 나는. 나는 자꾸만 모르겠다. 오히려 이 땅의 우리 장막이 무너지는 게 살 길이 아닐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나의 이 안둔하고 소극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날들 가운데서, 다만 애통할 따름이다. 나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리하여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103:4-5).” 그저 나는 말씀 붙들고, 주의 집에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그러므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65:4).” 나는 그저 가난하여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