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19. 3. 22. 07:07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민수기 13:30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한 아이만 글방에 오지 못하고 있어서 같이 오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벌써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아이엄마는 글방이 교회여서 싫고 선생이 목사여서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는 데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미션스쿨을 다녔었다는 말로 선을 긋고 더는 다가오지도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는 데야. 주님이 하셔야 할 일이었다.

 

마음이 어려웠고 괜히 서운하기도 한 것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늘 처음이 아니면서도 이런 일은 항상 익숙하지가 않다. 내게 붙이시고 보내시는 아이만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 이를 아무리 말로 설명한들 듣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어찌할까. 아이는 그저 다른 형들이 재미있게 다니는 것 같아 같이 가고 싶은 것일 텐데.

 

새롭게 되는 날.’ 어쩌면 우리에겐 이와 같은 날이 필요할 뿐이다. 그 길은 회개뿐이다.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일 뿐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과 보내는 목요일은 그래도 활기차면서도 정신이 없다. 어르고 달래 같이 잠언을 한 장 읽고, <배려>라는 주제로 글을 한 편씩 쓰게 하는 일. 평소 800자를 쓰던 아이들에게 1400자를 쓰면 다음 시간에 컵라면을 쏘겠다고 하였다. 거기서도 드러난다. 호언장담하며 제일 나서서 잘난 체 하던 녀석이 가장 먼저 포기했다.

 

자꾸 질문을 하고 물을 흐리던 녀석은 결국 간신히 평소처럼 800자만 썼다. 그런데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한 녀석이 우직하게 앉아 한 시간 안에 1400자를 다 채운 것이다. 어쨌든 다음 시간이 너의 이름으로 다른 친구들도 컵라면을 먹을 수 있겠다! 하고 칭찬을 하였더니 우쭐하여 돌아갔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이 내가 평소 감추고 사는 태도와 감정과 허풍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곧이어 중학교 아이들도 좀 더 글자 수를 높여 200016001400자로 학년별로 차등을 두고 글을 쓰게 하였다. 묽은 약속과 동일한 태도가 아쉬웠지만 그래서 새로 시작한 아이가 끝까지 하려고 하는 게 기특해보였다.

 

애들은 애들이라고 겨우 컵라면 하나 때문에 의지가 달라진 것이다. 성경에서 새롭게 된다.’는 말은 이와 같이 목적이 생기는 것이고 그 이유가 기존의 안이함을 능가하는 것이다. 바울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하던 것이 어느 훗날 우리로 더욱 주 앞에 통회하며 나아오게 하는 기틀이 되기도 한다.

 

종교적인 일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아이엄마의 당돌한 표현을 오래 곱씹으며 저의 사정과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어느 훗날 저에게도 돌이켜 회개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느라 지체되는 시간 가운데서 아이가 겪고 혼자 견뎌야 하는 소외와 거절과 억압을 안쓰러워하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긴 우리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될 수밖에 없다.

 

나는 저의 절묘한 논증을 좋아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어쩌며 이는 당연한 것이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 이런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육신의 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영의 일을 생각할 겨를도 마음도 없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7).”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나의 지난날들을 떠올려도 백번 이해가 된다. 그때 같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가운데 여전히 거기에 있는 친구들의 논리를 당할 수가 없다. 이로써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어쩌면 당연한 이와 같은 말씀이 이제는 설득력이 있는데 저들에게는 억지스러운 것이어서, 글방이 교회여서 싫다는 말이 나는 여전히 아프게 다가온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9-10).” 몸은 죽었고 영은 살았다는 말씀이 이제 나는 귀하다. 여전히 몸이 원하는 것에 이끌리고 마음과 생각은 저들끼리 갈구하는 것을 좇으려고 할 때가 많지만. 그러다 이처럼 어느 아이가 마음에 들어왔는데 어처구니없는 억압에 봉쇄되면 그야말로 암담하다.

 

이를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나는 하나님께 공을 돌려서 보내주시지 않으면 어찌할 방도도 없다고 투정하는데,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3:18).” 더는 기도도 할 수 없는 날이 올지 모른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이치이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이를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8).” 바라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곧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21).”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비로소 기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 사망을 이기신 이가 계시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7-58).” 여기에 답이 있었다.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결코 이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새롭게 읽혀진다. 다들 어렵다 하고 극구 반대하는 가운데,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13:30).”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자가 소수여서 열은 부정적이나 둘만 이를 붙드는 것이다. 같은 문제 앞에서 우리는 늘 불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러니 누군들 호언장담하고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객기를 부릴 수 있겠나? 말만 살아서 그저 허풍만 떨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야말로 부화뇌동하지 말고 묵묵히 말씀만 붙들고 한 영혼으로 귀히 여길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맞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었으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다음에 이어지던 말씀이 새삼 큰 교훈을 더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 아이라고 저를 함부로 여기고 업신여기면 곧 주를 대적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마치 새삼 알게 된 사람처럼 나는 뜨끔하다.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대충 여겨 내버려두었던 저 아이 하나의 값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었으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5:1).” 내 선의와 의지로는 말도 안 될 소리다. 누구 때문에 마음이 고약해지다가도 저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서, 알지 못함으로 그러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적이 아니라 위하여 주께 아뢰어야 할 예전의 나였던 것이다. ,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날마다 자신은 죽는다고 했던가. 자기가 죽지 않고는 자기 안의 그리스도의 영이 살 수 없다는 데 나는 이제 100% 동의 한다.

 

나야말로 내가 죽지 않고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그래서 애통함으로 주께 고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곧 내가 대적해야 하는 적은 절대 가망이 없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열 명의 반대자들이 아니라, 내 안에 이는 갈등과 회의와 덩달아 동조하고 싶은 욕구였으니. 주의 성산에 사는 자는 그 뚜렷한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2-5).” 나로 하여금 그러할 수 있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