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민수기 20: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22:19
엎드리고 주 앞에서 지팡이를 잡는 일. 때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보다 자기감정에 겨워할 때도 많지만.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오늘 아침은 본문은 ‘므리바의 반석’으로 인해 저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 하시면서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져 그 뜻을 더하시는 데 놀랍다. 나는 아둔하여 무엇이 어떠한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으나 아, 하고 멈추곤 하는, 어떤 이해. 오규원 시인은 ‘인생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닌 것/ 문득 - 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쳐나니/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고 노래하였다.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니다. 왔다 가는 덧없음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지혜자는 전도서를 그리 마무리 지었다. 저가 말문을 열 때,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2-3).” 하고 물었다. 우리는 실제 답을 다 안다. 회피할 뿐이고 모르는 척 하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매일은 묵상글을 쓰는 게 가장 큰 일이고, 한 주간으로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무엇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처신하였는가하는 게 고스란히 밴다. 그래 맞다. 어제도 묵상하였던 문장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자신에게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단지 지나가는 무엇이어서 우리는 다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다만,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 3:1).”와 같이 단순하며 명료한 것이어서 도제의 삶으로 석공이든 목공이든 조적공이든 반복하고 반복하여 무던히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를 연마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더욱이 설교준비를 할 때 나는 그 말씀을 전한다는 일을 그리 단순히 여긴다. 아침 일찍 글방으로 들어서다보면 일층 우동집 주방에서 한 여자는 식재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늘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을 반복하는 모습이어서 때론 경이롭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더욱이 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와 같아서 결코 진리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의 언어가 가진 함의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해하고 연구하여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전달한다는 일. 나는 비록 별 볼일 없는 사람이면서도 이 귀한 사명 앞에서 언제나 ‘이끄심’을 느낀다. 잠깐 스친 것 같은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는다는 일은 놀랍다.
결국 자신을 웃어넘긴다는 것은 그리 어떤 일에 얽매이기보다 그 일을 주도하시는 하나님께 뜻을 모으는 일이기도 하다. 목요일 하루, 아이들과 왁자하게 보내는 시간이면 그 의미는 더욱 새로워진다. 결코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다.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 요구만 하지 배려나 양보는 없다.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자신이 해야 할 것에 대하여는 배제하는 것이다.
미흡한 자신을 허용하자 되레 다른 아이의 결점을 들어 꾸짖는다. 너도 이러했는데, 하고 말해줘도 무슨 말인가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자기중심적이다. 마땅히 컵라면을 주기로 했지 않느냐는 것이다. 뭐라 나무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자라야 나을 병이다. 새로 아이가 왔다. 이번 주 주제는 <중독>이었다. 그 애가 핸드폰중독으로 정신과치료까지 받았다는 귀띔을 들었다. 그런데 자기 글에서 엄마의 흡연 종독을 문제 삼아 길게 이어갔다. 글을 끌어가는 힘은 놀라웠다.
물론 아이들이 쓴 글을 서로에게 공개하지 않고 나만 읽고 첨삭하였다. 그런 뒤 보니 다소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필기구며 노트 따위를 다루는 일이나, 원고지 칸 수 안에 반듯반듯 적어 내려간 글자들 하며. 뭘까? 하고 주께 구하고 강한 호기심으로 아이를 주목하였다.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는 모두 의미가 있다. 때론 밉살맞고 되바라져 그 잔망스러움에 속을 보일 때도 있지만. 주가 우리에게 두시는 아이들이라.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이 말씀을 확대하면 주님이 오신 것 같이 아이들을 보내신다.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면 우연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이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엄연한 구별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즉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우리에게 두시는 아이들이라. 공부도 못하고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아이에게 잘한다, 잘한다, 곁에 앉히고 응원을 하였더니 묘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제는 800자만 쓰면 되는데, 새로 온 아이가 800자를 넘겨쓰자 덩달아서 계속 더 쓰는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3:2).” 우리의 마비된 영혼을 일깨우는 기적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5).” 그러니까 내게 있어야 하는 것, 그 확신으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다음은 주가 하실 일이다.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사람들은 그저 놀랄 뿐이다(6-10). 이를 바울의 목소리로 다시 들으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새로 온 아이와 늘 무기력하게 끌려오던 아이가 만나 서로 견주어 의식하는 게 신기하였다. 또 새로운 아이의 글이 거침이 없고 그 속엣 얘길 가감 없이 풀어가는 데 놀랐다. 그냥 와 본 거예요, 다음 주엔 안 올지도 몰라요, 하는 아이에게 굳이 나는 오라마라하지 않았다. 것도 다만 주님이 하실 일이어서, 나는 그저 거기 있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아이를 주께 아뢰는 일. 뭐지? 싶은 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께 되묻는 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그는 결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3-4).” 그러므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7).”
말씀하신 이가 말씀으로 이루실 것이다. 다만 나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도제와 같다(벧전 3:15-16). 비록 내게 은과 금은 없어도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내게 확실히 있는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그럼 저 아이들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8).” 할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9).” 놀라워할 것이다. 우린 다시 명령대로 주 앞에서 지팡이를 잡는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민 20:9).” 그리고 아뢴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 곧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4).” 이를 알면 알수록.
비록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 그러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11).” 오직 더욱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8).” 그러나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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