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전봉석 2019. 3. 30. 07:10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21:9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쉴 새 없이 드는 원망의 순간순간은 다채롭기까지 하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나싶은데 정말로 그 정도가 대수롭기까지 하다. 불쑥, 화가 올라오는데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못마땅하게 여겨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성에 차지 않아 드는 감정이다. 우리 안에 이는 온갖 감정의 정체가 실은 자기만족을 향한 것이다. 만족스럽지 못한 게 못마땅한 것이고, 못마땅하니까 드는 마음이 원망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어지간하다 싶을 정도로, 오늘 우리 이야기와 닮았다. 마치 우리 이야기가 몇 천 년 전의 이야기로 서술되어 있는 것 같다. 점심께 주인이 건너와 커피를 한 잔 했다. 무슨 일로 부동산과 한 시간 가까이 옥신각신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로 들어오는 누가 무슨 일로 요구가 많고 그런 걸 부동산에 말해서 저가 요구를 하니 화가 났던 모양이다. 들어보면 임대인이나 임차인이나 어떤 불만이 상대를 겨눌 때 원망이 되어 찌른다.

 

이스라엘 이야기의 구조는 원망하고, 혼나고, 용서를 구하고, 치유해 주시고, 한동안 평안하다가 다시 원망하고, 혼나고, 용서를 비는 반복적인 이야기 구조다. 결코 저들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그런 가운데서 만들어져 간다.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그때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21:9).” 그 놋뱀이 들린 것 같이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들려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이에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도무지 다스릴 수 없는 게 나의 감정이라.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차를 몰고 저기 저수지로 갔다. 봄바람은 거침이 없었고 몇몇 강태공이 그 바람에 몸을 떨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잠깐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홀로 앉아 찌를 겨누는 저들의 시선 속에는 무슨 생각들이 담겨 있을까? 나의 생각은 부질없어 닿을 길 없는 바람 같이 흩어졌다. 차에서 내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휘익, 나갔다 온 것으로 족하였다.

 

주보를 뽑고 다들 일찍 귀가 한 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면서 나의 한 주간은 마무리가 되었다. 등짝에 땀이 고였는데 그대로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는 말씀대로 할 뿐이다. 나름 그 정해진 시간에 따라 묵묵히 하던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늘 생각이 미치는 자리는 못마땅한 지점이다. 며칠째 생각이 많다. 토요일에 딸애가 사귀는 애가 온다고 하는 것을 한 주 늦추었다. 그리고 오늘 좀 진지하게 딸애와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못마땅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풀리지 못하는 것은 어디서 꼬였다는 게 분명하다. 저들 이야기다. 그걸 쉬쉬하고 몰라도 된다고 덮어놓는 것은 옳은 게 아니다. 그럼 자꾸 싸움이 되니까, 하는 딸애의 말에 나는 제동을 걸었다. 싸워야 하는 일을 덮어놓는 것은 더 큰 화를 자초할 뿐이다. 저들 이야기를 넘겨짚어 서술할 수는 없다. 물론 저들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저 위로하고 좋게 지내는 것은 남일 때, 좋아하는 정도일 때, 딱 그 정도 거리에서 쯧쯧쯧 혀를 차고 토닥거리는 정도이면 된다. 한데 가족이 된다는 것은 치열한 문제다. 볶여 못 살겠는데도 지지고 볶고 아옹다옹하면서도 사는 일이다. 오늘 말씀에서 나는 그 원리를 읽는다. 차라리 끝내면 그만일 사이거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우회하면 되는 사이라면 굳이 다시 볼 일이 무언가.

 

하나님은 저들을 포기하실 수 없었다. 가족이 된다는 것도 같은 의미다. 그러니 죽여서라도 살려야 하는문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주께 지혜를 구하고 마음의 평안을 원하였다. 나는 딸애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없고, 뭐라 강제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내가 어떤 답을 가지고 방법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틀 전에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좀 시간을 두었다. 서로 기도하고 생각을 모으고 오는 토요일에 얘기를 하자고 하였다. 서로 좋다고 좋은 관계로 지내는 거야 뭐라 하겠나. 그런데 그게 같은 식구가 되고 가족이 된다는 건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하나님과 식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생각이 많아 마음만 어수선한 가운데 하루 이틀이 금세 지났다. 말씀을 저만치 두고 마치 화폭에 담긴 그림을 감상하듯 서너 걸음 떨어져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느낌으로 사는 게 아니라 발로 딛고 몸으로 부대끼며 징글징글하게 사는 것이다. 저들 원망도 백분 이해가 된다. 이번엔 길 때문이다. 왜 이처럼 돌아가야 하는가? 광야에서 우릴 죽이려고 인도하였는가? 또 금세 주의 긍휼하신 성품이 아니라 자신들의 성질대로 못마땅함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자주 시선을 놓치고 생각을 멈추었다. 어느새 딸애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인생이란, ‘우물쭈물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게 결론이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인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4-25).” 주께서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평안이었으면 좋겠다. 고질적인 불안과 걱정을 나는 감당할 길이 없다.

 

그런 내게 오늘 아침의 말씀은 새롭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 때론 내가 그릇된 길로 갈 수는 있으나 그런 나를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그 안에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도 포함이 된다. 적을 방어하는 것이면서 나를 안위하시는 것이다.

 

어떠하든 주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 이로써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나는 나의 언어로 나의 감상을 적고 싶지 않다. 그림 앞에서 심오한 표정으로 남 얘기하듯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 주는 나를 인도하신다. 나는 그의 길로 간다. 비록 우회하고 돌아 너무 먼 길을 가서 원망이 또 인다 해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이러는 것까지도 모두 주께서 하심을. 그리하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아이는 오늘 잔업이 있다며 출근을 한다 하였고, 오늘 올지 못 올지 아이와 정해지는 시간을 우선하고 딸애와는 그 뒤에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심각할 건 없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사연이 생기고 어떤 우여곡절이 겹친다 해도,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