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19. 4. 18. 07:21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신명기 4:23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삼가 그것이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나아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주의해야 한다. 너무 의미를 두는 모든 사물이나 개념은 우상이 된다. 말씀이 그 기준을 분명히 하심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이에 그 가치는 엄청나게 불어나서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으로도 환산이 안 된다. 그만큼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무엇이 화재로 유실됐다. 그 가운데 무엇은 보존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는 무엇이라 적고,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다.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사용되는 무엇을 성물(聖物)이라 하여 가중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나는 주의한다. 함부로 여길 게 아니지만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 그것이 숭배가 될 수 있다. 누구를 성인(聖人)이니, 무엇을 성물이니 하는 표현을 나는 별로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베드로는 베드로일 뿐이다. 요한은 요한이고 바울은 바울이었다. 저들은 말하였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누가 마약을 했네, 무슨 동영상을 유포했네, 하는 기사와 함께 프랑스 어디 유구한 역사의 대성당이 불에 탔다는 기사가 어제그제 되풀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아파트단지 벚꽃은 흐드러져 꽃잎이 바람에 날리었다. 바닥에 쓸려 눈길처럼 꽃길을 걷는 것은 설렘이다. 색깔은 종잡을 수 없어 개념을 가둘 수 없다. 꽃송이 안쪽과 바깥쪽의 색깔이 달라 나는 형언하지 못하고, 뒹구는 꽃잎을 보다 가만히 휴대전화로 찍어두었다. 꽃잎은 신생이다. 파릇파릇 이파리가 돋아나 빛과 바람에 광합성하는 모습은 경이롭다. 있는 그대로 찬미가 된다.

 

인위적인 것은 변질된다. 사람이 만든 무엇도 성스럽지 못하다. 모든 물건은 사용과 쓰임을 넘어서면 개념이 되고 숭상이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지지와 호응을 한 몸에 받던 누가 성관계 동영상을 찍어 유포하였다. 누구는 마약 혐의 피의자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하면서 머리카락과 눈썹만 남기고 온 몸의 털을 깎았다. 공연을 앞두고 원래 그런다는 말이 궁색하게 들렸다. 앞과 뒤가 다른 건 사람이 가장 난해하여 같은 듯 다르다. 나는 휘날리는 꽃송이의 안쪽과 바깥쪽의 색깔이 엄연히 다른 것에 놀랐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은 그 가벼움으로 못 견뎌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었다. 나무의 시간은 어찌 가늠할 수 없다. 소멸이 아니고 신생이라 여겨지면서 저절로 경탄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화가라해도 저와 같은 색깔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섞을 수 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것인데, 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의 호흡이 더해지면 그때부터 숭배가 된다. 누구를 좋아하는 일도 무엇을 바라는 마음도,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4:23).”

 

그래서 나는 오늘 말씀을 여러 번 되뇐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2).”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16-18).”

 

만듦으로 의미가 되고 의미는 우상이 되어 자기를 위한 게 된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4).” 우리에게 그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알아보게 하는 것으로 우리 곁에 자연을 두셨다. 내 앞에 말씀이 있다. 일상에서의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 우리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하시려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부활절을 앞두고 누군 특새(특별새벽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며 고난의 의미를 상기하는데, 나는 몸이 아파 저절로 고통스러웠다. 속을 달래며 근육이완제를 먹고, 해열진통제도 먹어보지만, 실은 허리가 아파서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걸었다.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걷는 길에 만개하였던 꽃송이들이 제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고 휘날리었다. 나는 누가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것을 놀라워하지 않는다. 오래된 무엇이 화재로 손실되는 것에도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휘두른 흉기에 다섯 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경악한다.

 

우리 사람은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참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9).” 부디 은혜를 받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자. 감사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28).” 마치 우리는 무어나 된 것처럼 굴다, 그 안쪽과 바깥쪽의 색깔이 모호해진다. 덕지덕지 의미를 더해 예수님의 면류관을 금줄로 묶어 성물로 취급한다.

 

어디서 읽었는데 몸에 문신을 하는 이가 선호하는 그림의 대부분이 십자가란다. 목걸이나 귀걸이의 모양도 그런 것처럼, 본질은 퇴색되고 사람들의 감정만 덕지덕지 붙여진 셈이다. 그럴 때마다 행동은 사람이 하고 그 행동의 성취는 하나님이 하신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6:1).” 그러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2).” 보이는 무엇을 신으로 삼아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드는 일이야 어쩌겠나.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대신하는 모든 게 여기 있었으니, 사람의 안쪽 색깔과 바깥쪽 색깔은 엄연히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이어야 하는지. 그 다름을 구분하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이 아닐까?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4:6).”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9).” 말씀으로 이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심쩍어서 어떤 형상을 만들고 의미를 더해 퇴색할 따름이다.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19).”

 

두렵고 떨린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24).”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9).” 그런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4:28).” 결코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5).” 이에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39-40).”

 

나는 다만 나의 연약함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주를 찬미한다.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꽃잎은 소멸이 아닌 신생이다. 하물며 가을의 낙엽을 보고 나무의 시간을 오해하는 것은 사람뿐이었다. 나는 흐드러져 휘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나의 몽매함은 연약한 육신과 다를 바 없어서 흐느적흐느적 그 정도에서도 충만하였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의 일부다. ‘다 이루었다.’ 주의 선언이 방점이 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그러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나의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