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32-33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43:4
‘그런즉’은 앞 내용으로 뒤 내용의 근거를 삼을 때 이어주는 접속어 부사다. 이 아침 각각의 성경에서 두 개의 ‘그런즉’에 따른 결과를 듣는다.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민 5:31).” 앞서 늘 우리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열 개의 계명을 읽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를 거스르면 나머지 아홉을 범하는 게 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접속어 ‘그리하면’은 앞 내용이 뒤 내용의 조건이 되어 앞의 내용을 더해 ‘그러한 결과’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32-33).”
그 기본 전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6).” 이 말씀에서 시작하였다. ‘그리하면’의 다른 뜻은 앞뒤 내용을 이어주어 ‘그렇게 하여’의 뜻을 전한다. 그러려고 그리하셨다는 하나님의 경륜이 읽힌다. 그 뜻대로 예정하신, 그리하여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다시 말해서 쓸 데 없는 데 정신 팔고 살지 않게 하시려고!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바울의 강조는 저기 나온 ‘출애굽’으로도 증명된다. 얼마나 열심을 다해 살았고 자신의 신념이 종교가 되어 저를 붙들고 있었던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3:2).” 나도 같은 맥락에서 이와 같이 음미한다.
나는 나의 ‘출애굽’을 기이히 여기며 살고 있다. 그처럼 추구하고 따랐던 삶에서 좋아라하며 어울렸던 것들에 대하여, 오늘 일련의 사회 사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 저들과 다를 바 없었고 저들만 못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죽어 마땅한 날 위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9).” 이와 같은 말씀 하나하나가 온통 나를 보고 이루시는 것 같아 송구하며 감사하다.
나의 체험이 종교나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를 종교적인 가치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을 이와 같이 고백하고 증언하는 사명이 남았다. 즉 아이들의 이런저런 고민과 그 사정을 듣다보면 어쩜 그리도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지! 때론 화가 나고 때론 속상하여 내가 더 안절부절 난리도 아닌데, 한 아이가 글쓰기를 더 해보고 싶어 했다. 공부고 운동이고 부모고 학교고 다 지긋지긋해하며 죽어버릴까도 했다는 그 심정을 나는 공감하였다. 화요일에 따로 시간을 정하였다.
의외로 좋아라하고 그리 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보며, 하나님은 어찌 저 아이의 마음을 돌리신 것일까? 아이를 두고 기도하며 그렇게 교회로 예배로 연결되어 그 가정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목격하게 해달라고 구하였다. 동생 아이도 순박하고 여린데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이 가득하여 조금만 건드려도 토라지고 울어버린다. 정이 많은 녀석이라 슬그머니 자꾸 내게 무엇을 준다. 나 주는 거야? 하고 나는 부러 호들갑을 떨며 좋아라하면 수줍은 듯 사내 녀석이 피식 웃으며 돌아선다.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아이들 등쌀에 기도 못 피고 지낸다는 걸 안다. 그 부모는 맞벌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아이들 일로 아내와 자주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아내의 일 중 가장 귀한 사역이 저들의 전화를 받아주고 들어주고 위로하는 일이 되었다. 우린 지혜를 구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먼저 저런(?) 아이들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이가 전화를 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킥복싱을 가려고 나왔다가 문득 전화를 하였단다. 나는 아이의 두서없는 말에 맞장구를 친다. 금방 했던 말도 도로 잊고 왜 나왔는지 몰라 산책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뜬금없이 ‘민들레가 보고 싶네요.’ 하는 저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사회적으로 물의가 빚어지고 있는 정신 병력이 거론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저 순한 아이가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하긴 우리 모두 짐승 위에 사람을 입고 산다.
부활은 개념이나 이상이나 종교적인 가치가 아니다. 사실이다. 말도 안 되는, 사실이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사실일 수 없는 사실 앞에 믿음을 수 없는 믿음을 붙들고 산다는 것보다 더 귀한 기적이 또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이 말들이 말씀으로 다가와 실제가 되는 것이다.
이를 나는 내가 저 아이들에게 갖는 마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누가 나를 알겠나만 나는 저런(?) 아이들을 아주 싫어하며 살았다. 나 같아서 싫었고 나여서 싫어했다. 멀리하느라 나는 기를 쓰고 평범해지고 싶었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실제의 부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증명 한다.
이를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때론 나의 삶 곳곳에 ‘그런즉’이 배어난다. ‘그리하면’이 증거가 된다. 마음이 어떠하다가도 ‘그런즉’ 곧 하나님이 나를 어찌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셨는가를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이건 좀 두려운 이야기인데 요즘은 ‘1인 방송’이 돈이 되는 세상이다. 조회수와 구독자수에 따라 광고가 붙고 번이 된다. 모 사이트에는 아예 개인방송 채널이 별도로 만들어졌다. 누군 먹고, 누군 화장을 하고, 누군 자신의 학식과 경험을 살려 가짜 뉴스를 생산한다. 그런데 무심히 열었던 어느 방에서는 딸애 같은 여자 아이가 반은 벗고 앉아 실시간으로 저속한 농을 하고 요염을 떨며 음란한 몸짓을 하였고, 접속한 이들이 좋다며 돈을 쏘아댔다.
여전한 저 애굽 땅, 그 풍토와 문화와 가치 기준 앞에서 나는 아찔하였다. 문득 드는 생각이 저처럼 아직 어린데 얼굴도 그 알몸도 다 팔리고 저의 남은 생을 어찌 살아가려고 저러는 것일까? 하는 어떤 두려움마저 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놀랐다며 그 장면을 다시 틀어주었더니 아내도 대뜸, 저 애들은 저러고 앞으로 어찌 살아? 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야말로 요지경이라. 자기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성관계를 맺는 동영상을 찍어 모은 누가 붙잡혔다. 그 안에 3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다는 보도에 놀랐다. 그러니 그 생활이 어떠했을까, 그리 사는 게 처량하고 피곤하였을 것 같아서 내가 더 서러웠다.
주님의 부활은 꿈이 아니다. 저는 유령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차원의 신비도 아니다. 실제였다. 실제를 실제로 알지 못하고 이를 종교화 쟁점화 하여 이상과 가치로 저만치 밀어두려는 사회가 결국 빠져드는 함정이란 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당장의 만족함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리는 아이들에게 나는 다시 또 했던 말을 하고 권하고 당부하고 일러 보낸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그럴 것이다. 도대체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은데!
글쓰기를 해볼게요. 하는 아이의 반응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 동생 아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온 것도 어찌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변화이다. 포기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던 아이들인데, 나야말로 한 게 없는데 저처럼 마음을 열고 다가와주니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하고 주님을 생각할 뿐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어디서 그런 고백이 나왔을까? 이를 아는 게 저의 것이 아니라 알게 하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 놀란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가까운 어느 훗날 나의 고백이 된 이것이 저 아이들의 입에서도 들려지고 나타날 것을 믿는다. 어찌나 더디 믿던 자이었던가?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그런 나를 오늘에 이르러, ‘그런즉’ 그리하신 이가 오늘 우리 곁에 두시는 저 한 영혼을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안다. 특히 사회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된 나의 곁의 아이를 위해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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