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신명기 3:22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말이 참 더럽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또는 진영논리로 서로가 마뜩찮다 해도, 모 현직 의원은 ‘징글징글하다’, ‘우려먹다’는 표현을 썼고 모 전직 의원이란 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저주와 다를 바 없는 말로 ‘세월호’에 대해 언급하였다. 말은 말 자체로 이미 더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속에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저들의 논리는 더러움에서 비열함으로 번져 자신의 말을 옹호하였다. 더럽고 비열한 말은 이내 사특하여져서 ‘자신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는 주장을 편다.
말의 한자 언(言)은 중국 은나라 때 점치는 데 쓰던 갑골문자에서 왔다. 말은 스스로 말을 반성하지 않는다. 억지로 우기고 버티다 다른 말을 할지언정 말이 말을 반성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3).” 그 말의 더러움의 원리를 예수님은 진작에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0).” 왜냐하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
그래서 왁왁거리는 가짜뉴스는 이길 수가 없다. 어느 프로에서 말의 전파를 놓고 실험한 적이 있는데 남을 비방하는 말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그 수가 엄청난 데 비해 칭찬하는 말은 조금 옮겨지다 금세 사그라졌다. 그 이유로 헐뜯음은 각자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질 때 재생산되어 각각의 비난과 조소가 섞여져 그 즐거움(?)을 더했다고 하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래서 정치인들이 가장 즐기는 게 ‘물타기’다. 던져놓고 이를 수습하기 어려울 때 그 말에 물타기를 하면 어느 순간 같이 더러워져 무엇이 더 더럽고 덜 더럽고 하는 의미를 잃는다. 이때 저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사가 ‘국민의 뜻’이다. 여기서 국민은 그 실체가 모호한 정치적인 수사일 뿐이다. 어제는 ‘세월호’ 5주기를 맞으며 서로가 위로하던 날이었는데 더럽고 비열하고 사특한 말들로 인해 그야말로 설왕설래하느라 그 의미는 퇴색되었다.
오늘 말씀은 이를 다시 보게 하신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어찌됐든 아픔을 같이 할 수 없는 마비된 영혼의 시대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가 죄 아래 놓였다는 데서 새삼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마주하게 하는 하루였다. 곧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할 수도 없는 우리의 악함을 두고 성경은, 의인은 없다. 이를 깨달을 자도 없다. 찾는 자도 없다. 다 치우쳤다. 무익하다. 그리하여 선을 행할 자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1-12).” 그러니 새삼 나에게 말씀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어기는 순간 혼란이 오고 다툼이 인다.
그저 우리는,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스스로들 흩어짐을 면하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5).”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의 어떤 소신이나 그야말로 ‘국민의 뜻’을 떠나 사람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마치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굴고는 하는데,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정말 두려운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종일 뉴스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이 얼마나 더럽고 비열하고 사특한 것인가를 무서운 마음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결국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이는 결코 끝난 게 아니다. 입바른 사과로 그저 물타기하고 넘겨질 문제도 아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누구더러 뭐랄 거 없다. 나야말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반드시 땅 끝까지 심판이 이를 것이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오히려 내가 두려웠던 하루였다. 저에 대한 혐오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일깨웠다. 언제든 그 이상의 말로 누구를 조롱하고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는, 말의 위력 앞에 공포를 느꼈다.
뒤틀린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자신도 그 주변도 모두 불행한 일이다. 나는 슬픔이 어려워서 <생일>이란 영화를 보지 못한다. 배우 전도연은 그 사실을 인정하며 그래서 그 배역을 맡았다고 하였다. 슬픔은 우리를 정화한다. 눈물의 힘이다. 오후께 아이 퇴근 시간에 맞춰 카톡을 나누거나 통화를 할 때도 울컥, 하고 이는 내 안의 어떤 감정을 나는 종종 주체할 길이 없다. 뜬금없는 아이의 말이 나를 일깨운다.
감정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이를 억제하고 절제하며 오늘 모세는 말한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신 3:22).” 같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을 바라보고, 저는 구하였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25).” 때론 아무리 아뢰어도 더는 들어주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26).” 하심 앞에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저의 기도는 기품 있고 훌륭하였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24).”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그는 담담히 주의 말씀을 전한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8).” 앞서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27).” 하신 주의 뜻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말이란 주체할 길이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 ‘면하려 할 때’ 이는 바벨이 될 뿐이다. 같이 슬픔을 위로하고 나눠야 할 날에 누구의 말로 인해 온 나라가 부끄러웠던 하루다. 한데 정작 저들 당사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변명하니 말의 사특함이란 그 주체도 삼켜버리는 주술 같은 것이어서 무섭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9).”
우리 앞에는 공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오늘 나는 일련의 사태와 사건을 접하면서, 또 하나의 기도의 말을 배운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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