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신명기 16:2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편 54:1
날씨 탓인지, 자꾸 몸이 아프다. 앉기도 서기도 눕기도, 육신은 고달프고 마음은 어려웠다. 어디 병원에라도 가야겠는데 싶다가도 그래봐야 또 같은 소리만 하고, 같은 처방일 테니. 좀 더 견뎌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났다. 오후께 문득 한 아이가 생각났다. 어찌 지내는가싶어 전화를 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날 아침 응급실로 해서 입원을 했다고 하였다.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였다.
신장에 무슨 수치가 높게 나오고 뭐가 어떤지 설명을 들어도 그게 무슨 소린지. 나는 아파서 더욱 주를 찾고, 저 녀석은 겁나서 허세를 떨었다. 죽기야 하겠어요? 짧고 굵게 살지 뭐! 뭐라 말해도 객쩍은 소리만 해대니 순간 짜증도 일었다. 이제 겨우 마음잡고 두어 달여 어디 취직을 해서 집 밖으로 나온 것인데, 나는 그것이 심리적인 이유가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뭐라 한들 좀체 들어먹지 않는 녀석이라, 그나마 통화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선생님이나 잘 하세요! 하는 식이었으니.
급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하루 이틀 더 보고 문병이라도 갈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어디가 아프다는 건 괜히 의기소침해지기 십상이다. 잘 퇴근을 했는지, 아이의 전화가 꺼져있어 걱정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고, 하는 게 너무 없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 같고, 한다고 한들 오히려 좋은 성과도 없는 것 같고, 그러느니 안 하니만 못한 것 같아서 마음만 자꾸 어려웠다.
아침에 한 아이를 마주쳤는데 얼굴을 돌리고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가 그 얘길 했더니, 중학교 가도 글방에 안 간대! 걘 요즘 그래! 하고 더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잘한다고 잘한 건데 아이들에게 상처만 주었나. 괜히 나 때문에. 하는 생각으로 오후 내내 시달렸다. 조금은 한심하고 처량한 생각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56).” 하는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언제부턴가 돌아온 탕자에서, 쓸데없이 권위적이고 신중하고 공연히 남의 발목이나 잡는 탕자의 형이 된 것만 같았다.
몸도 아프고, 아이가 입원했다는 소식도 그렇고, 어린 것이 내게 뭘 그리 서운했던지 내년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글방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니! 퇴근한 녀석은 계속 전화기가 꺼져 있어 공연히 또 마음이 쓰여 걱정이 앞서다,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터리가 다 된걸 모르고, 퇴근 후에 깜짝 잠이 들었다가 깼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어디세요? 오늘 하루는 어떠셨어요? 좀 괜찮으세요? 아이의 뜬금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고마움인지 서러움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이 눈물처럼 울컥, 내뱉아져 길게 숨을 쉬었다.
우리의 슬픈 농담과 서글픈 유머와 객쩍은 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이제 오늘이면 녀석은 공장을 그만둘 것이다. 횡설수설 오락가락 생각과 말과 행동은 주체할 수 없어 힘에 겨운데도, 그래도 날 위해 몸은 좀 어떤지? 하루는 어떠셨는지? 조심히 들어가시라는 말을 이 아이만 내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인즉, 산다는 게 네 생각대로 안 되지? 마음먹은 대로 안 되지? 오히려 그 이상이지 않니? 하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이어지는 말씀도 그렇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6-28).” 나는 그저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말던 것들로부터 예수님은 교훈을 끌어오셨다. 고작 저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들에 핀 꽃을 보고?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 이 꽃 하나만도 못한 주제가 마치 뭐나 된 듯 허세를 떨고 과욕을 부르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0-31).” 나의 염려와 근심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하는 게 있든 없든, 내가 무얼 얼마나 대단히 잘 하고 있다 한들! 나는 어쩌면 나의 사소함으로 놓치고 사는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공연히 신중하고 누구를 대하면서 쓸데없이 진지하여 판단하고 뭐라 나무라고 심지어 한심하게 여기기 일쑤였으니!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 공의가 곧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나의 기준이나 이해의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명석하다 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긍휼하심으로 주의 공의는 선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오늘도 이처럼 말씀이 나를 주도하신다. 늘 나는 나의 미련하고 연약함을 마주할 따름이다.
좀 웃긴 예이지만,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온 몸이 아파서 파스를 붙이고 바르고 법석을 떨어대지만, 정작 아파서 잠을 깬 것은 혓바늘이 돋아 그 쓰라리고 뻐근함에 공기가 닿는 것에도 몸서리가 쳐졌으니. 아 이 보잘것없는 육신이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럼에도 주가 함께 하시는 이 순간이 낙원이었다. 몸을 비틀며 어깨가 아파서 끙, 하고 들어올려 자판을 치면서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는 말씀에서 힘을 얻는다. 영원히 들어갈 본향이면서 오늘도 관여하시고 함께 하시는 한 날의 수고에서도!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주신 날을 사는 게 은혜였다. 어떠하든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공의였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어디 막연한 개념이나 신조가 아니라, 허리를 곧추세우며 끙, 하고 내는 신음소리와 같은 실제였다. 내가 누굴 위하고 바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하든 그럴 수 있는 마음과 중심으로 주가 두시는 소망이 있었으니.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5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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