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명기 24:19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편 62:11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아이가 글을 써서 카페에 올렸다. 그것도 두 편이나 썼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하려고 한 것이 기특하였다. 이번에도 안 하면 나도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어쩌다 무엇도 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일까? 오렌지를 까서 주고 글을 같이 읽었다. 읽으며 조심스럽게, 가족들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남겨두었다.
녀석은 퇴원을 하였지만 결국 직장을 그만둔 모양이었다. 아직 몇 가지 더 검사를 해봐야 한다며, 다리에 힘이 빠지는 원인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심리적인 요인이 크다고 단정 지었다. 밖으로 나오려는 의지와 여전히 자기 안에 숨어 지내려는 자기애가 서로 견주어 일시적인 몸의 마비로 온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찌 설명할 길이 없고, 아이가 들으려고 하지를 않아서 나는 문자로 묻고 답하고 미뤄두었다.
아이엄마에게 거두절미하고 글을 좀 쓰시자 권하였다. 마침 가족사랑이란 주제로 수기공모를 하는 곳이 있으니, 자신이 불안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된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꽤 진전이 있을 거였다. 본인은 글재주가 없어서 어렵겠다며 답이 왔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쓰는 그 자체로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그 공고를 복사하여 다시 보내주었다. 벌써 십여 년째 두문불출이라 쉽지 않을 거였는데, 자꾸 마음에 두시니 나는 아이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아이엄마에게 말을 건다.
아이는 복지관에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실습을 하느라 글방에 오지 않았다. 오후에는 직업훈련으로 어디 매장에서 사람들 속에서 물건을 나른다고 하였다. 안 힘드냐? 하고 물으면 늘 괜찮다고 하던 녀석이 사람들이 많아서 어지럽다고 하였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도 잘 이겨내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아이의 엉뚱한 대답이 마음을 울렸다. 하늘을 보고 싶어요!
다들 저마다의 사연과 우려와 고통을 안고 산다. 대체로 내 주변에 있는 저들 ‘장애’로 인해 나는 나의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을 느낀다. 벌써 53년을 살아온 터에 새삼 나의 ‘자기 십자가’가 마땅하였다는 것을 이제서야 배우고 있는 셈이다. 나의 것으로 저들의 것을 이해하고 주의 사랑과 마음을 바라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지 이제 조금은 알겠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2).”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은 없다. 다들 자기 몫의 생을 다하는 것뿐이다. 이때 저마다 행한 대로 갚으심을 산다. 이는 저주나 징계가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내 곁에 두신 이들의 느림과 더딤을 통해 나는 새삼 나를 배우는 것 같다. 서로 어쩔 수 없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끙끙거리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기어이 말씀 앞에 세우시는 그날까지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까지 내 안에 두시는 저들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인상적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다들 자기 살 궁리에 여념이 없지만 성경을 따르는 삶이란 좀 허술하고 속아주고 손해 보는 생활이 맞겠다. 나의 잃어버린 한 뭇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그리 이해한다.
종종 나는 아이의 지각을 두고 나무란다. 뭘 하지 않았을 때도 뭐라 한다. 그럴 때면 저를 위한 것보다 내가 잃은 ‘한 뭇’의 내 몫을 먼저 아까워하며 손해 보기 싫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 때문에 내가 허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데 성경은 남겨두라고 하신다.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라고 하신다. 심지어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 시간이나 마음이나 물질이나 어떤 수고에 대해 헛되이 버려지는 것은 없다. 주가 쓰신다.
가령 엊그제 한 노파가 바람이 찬데 길가 구석진 곳에 앉아 소쿠리에 콩을 담아 팔고 있었다. 현금이 없을 때는 모르겠는데 마침 만 원짜리가 있어 아내에게 슬쩍 한 소쿠리만 사라고 언질을 했다. 노인은 우리의 수작을 눈치 채고는 춥고 아파서 일찍 들어가고 싶으니 나머지 다 합쳐 2만원에 가져가라고 하였다. 나는 현금이 없어 망설이는데 아내는 그냥 한 소쿠리에 5천 원어치만 사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낸 김에 만원어치 주세요, 하고 두 소쿠리를 받아들고 돌아서자 아내가 뭐라 핀잔을 주는 것이다.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말자.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 24:6).” 물건 살 때 너무 깎거나 덤을 바라지 말자.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20-21).” 쥐뿔도 없으면서 여유 부린다고 아내는 뭐라 하지만, 이때껏 풍족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어찌 인도하셨던가?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22).” 이러니저러니 해도 굶주리지 않았고 아이들 옷도 철마다 새로 사서 입힐 수 있었다. 그래놓고는 자기 입으로 하는 말이, 그런 거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부잔 거 같아! 오빠네도 그렇고 다들 사는 거 보면 죽어라죽어라 하는데 우린 늘 잘 먹고 잘 살잖아? 나는 이런 아내의 단순함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 보니까, 내가 사는 것도 아니다. 애들이 이만큼 잘 자라준 것도, 내 몸이 이만큼 건강히 잘 살아온 것도, 그때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게 어디 있었나?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주의 인자함이 주께 속하였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오듯 주의 긍휼하심은 항상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저들의 ‘장애’를 대신 할 수 있겠나? 다만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 나는 다만 남겨두고 온 내 몫의 한 뭇을 도로 찾으려하지 않는 게 순종이었다. 말해봐야 뭐하나 싶어도 그런 마음을 두시면 말 걸고, 다가가고, 아는 체 하면서 같이 듣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게 내 일이었다. 다른 수 없다. 나는 마치 좋은 식재료를 골라 정성껏 다듬고 요리하는 주방 일처럼 말씀을 읽고, 누구 이야기를 듣거나 읽고, 관심을 두고, 주께 대신 아뢸 뿐이다.
모처럼 몸이 덜 아픈 날이었다. 이만만 해도 살겠다. 소위 내 코가 석 자고, 내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이며, 나 하나로 쩔쩔매는 위인인데, 그래서 더 저들의 사정과 사연이 마음에 남아 신경 쓰이고 거슬려, 주께 고하며 대신 구하게 되는 일이었으니.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이치가 그렇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위한다. 아픈 자가 아픈 이를 챙겨준다. 잘 먹고 잘 사는 형편의 사람들이 모여 민생을 운운하고 가난하고 팍팍한 서민의 삶을 운운할 때면 역겹다. 하는 일도 없이 엄청난 국고의 급여를 받고,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일 년에 몇 억의 이문을 남기는 자들이 청년 실업을 운운하고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언급할 때면 그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보여주기 위해 백팩을 매고 시장에 앉아 상인들이 건네는 음식을 얻어먹는 모습이 나는 꼴보기 싫다.
아,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2).” 것 또한 나의 옹색한 마음이려니. 저 또한 저의 일에 열심인 것을. 나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자. 누가 옳고 그름은 내 알 바 아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나는 중1 아이의 어깨를 툭툭 토닥이며 글 좋다, 잘 쓴다, 좀 더 열심히 해봐! 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할 뿐이다. 아이엄마에게도 그저 그리 말해줄 뿐, 실은 그렇게 말문이 트여 방문을 열고 저이가 밖으로 나올 수만 있다면! 아이의 마비 된 다리도 그리 풀어질 것을.
나는 주가 하시면 될 것임을 확신한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을 다할 뿐이다. 내가 뭐가 돼서가 아니라 그리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수혜자로서 말이다. 나는 목격자다. 증인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6).” 이제와 이것이 가장 귀한 것을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요 혜택이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7).”
그러니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나의 나 됨을 바로 아는 것,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0) | 2019.05.10 |
---|---|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0) | 2019.05.09 |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0) | 2019.05.07 |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0) | 2019.05.06 |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0) | 2019.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