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명기 26:10-1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편 64:10
즐거움이란 주신 것으로 충만히 사는 일이다. 평안이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은총이란 그 결실이 수고와 노력한 것에 비하면 한없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날마다 터지는 사건 사고에서 베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이는 지혜자의 절규와도 같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이를 듣고 두려워 떨 줄 아는 것이 은혜를 바란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죄와 사탄과 죽음과 율법’에 대하여 묵상하고 설교 원고로 정리하였다.
아이는 일찍 와서 끝도 없는 일기를 썼고 책을 읽고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틈틈이 탈고를 하였고 아이 상태를 살폈고 사진을 찍었다. 잘 도착했니? 아이가 돌아가고 직업훈련장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작정을 하고 설교 글을 썼다. 좀, 머리랑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아요. 괜찮아요. 허리가 아파요. 물을 마시면 될 거예요. 이어지는 아이의 말로 나는 저의 컨디션을 살폈다. 스트레스가 되는구나! 마트에서 일을 배운다?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장애가 나로 하여금 그 안에 있는 말씀의 내주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스물세 살의 아이가 예닐곱 살 아이와 같으니까. 그래도 대화가 통하고 지신이 하려는 의지가 있으니까. 우리가 서로에게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 어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마주하게 된다. 내 안에 두시는 여러 마음이 그러하지만 우리의 기도도 또한 하나로 이어져서 다르지 않다.
누구도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노력하는 모든 게 죄로 인하여 더욱 악할 뿐이다. 경찰이나 검찰이나 저들이 필요한 것은 다들 숨기려고 하는 죄를 파헤치려는 일이다. 청렴한 집단이란 없다. 검경수사관을 두고 두 기관이 첨예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그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하나님도 다른 방도가 있었으면 그 방법을 쓰지 않으셨겠나? 구약은 이를 증명한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고 잡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사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결국 하나님이 직접 담당하시는 수밖에는. 그렇듯 악한 세상에서 나는 아이를 통해 본래 순수하여야 하는 우리의 영혼을 마주하곤 한다. 왁자한 사람들로 인해 불안하고 어려운데 그럼에도 괜찮다고 하는 것 자체가 벌써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소리다. 나는 내가 유약한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에 이를 말려야 하나, 잘 이겨내라고 격려해야 하나.
중딩 아이들이 하루 전 체육대회로 들떠서 글방에 오기 싫었는가보다. 둘은 같이 치과를 간다고 하고 한 녀석은 줄다리기 훈련을 하다 손가락이 삐끗했다고 하고. 풋, 웃으며 나는 그럼 쉬라고 답하였다. 죽을 둥 살 둥 나는 그리 애쓰는 일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10년을 마저 절간에 앉아 글씨를 썼다는 한석봉이나 그러라고 모질게 다그친 그 어미나. 그리하여 명필이 되어 이름 석 자를 남긴들? 모르겠다, 나는.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별로 응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내는 그럴 거면 애들 글방에 안 보낼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좋은 날씨에 또 체육대회 연습을 하며 낄낄 깔깔 그 즐거운 날에 누군들 글방에 와서 되도 않는 글을 쓰고 싶어하겠나! 그래도 중1 아이 하나가 혼자 와서 나는 기특하여 비스킷을 주고 냉녹차를 내주며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너무 애쓸 거 없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우리의 값을 지불하셨다.
오히려 나는 아등바등 사는 게 죄로 여겨진다.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인가? 다들 죽어라 벌어도 살까말까 한 세상에서 우리의 평안이 곧 은총이고 은혜이고 차고 넘치는 즐거움이지 않겠나? 나는 같은 층에 있는 교회를 지나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그럴 때면 대부분 비어 있는 저의 둥지를 보면 마음이 좋지 않다. 너무 바쁘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또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뭐가 그렇게 항상 분주하다. 같은 건물 여러 개 교회가 모여 뭘 한다고도 들었다. 전에 내게 권하는 것을 나는 정중히 거절하였다.
잘 모르면서 뭐라 할 소리는 아니지만, 날마다 불 꺼진 저들 예배당을 지나치면서 드는 생각은 그저 아쉬움이다. 나는 셈이 단순한 사람이라, 저들의 사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한 달에 50만원이다. 그럼 하루 평균 만 오천 원씩은 물고 있는 곳인데, 그래서 나는 들어앉아 있는 것으로도 그 돈을 버는 것이라 생각한다! 얼핏 듣기로 아래층 어디에 자기 사무실을 두고 있다고 하였으니, 그 사정이야 모르겠으나 참 아까운 공간이고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아이에 대해서도 나의 마음은 그런 수준이다.
다들 장래를 염려하고 어찌 그 처우를 걱정하는 것이겠으나, 마트에서 스트레스 받아가며 굳이 그런 걸 훈련이랍시고 계속 보내야 하나? 내가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건 아니라는 생각에 가만있지만 그러자니 애만 탄다. 다섯 시가 되어 잘 끝났니? 오늘 어땠니? 하고 카톡을 하다 답답하여 통화를 하면 나의 하루 일과도 정리가 된다.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내게 두시는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여섯 시가 다 돼 중1 아이가 원고를 끝내자 애썼다고 토닥거리며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와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한다. 주께 와도 쉼이 없다면 아직도 오지 않았거나 당도한 곳이 다른 곳이거나. 그 주님은 다만 나와 함께 하실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저가 우리의 사망을 폐하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그리고 말씀을 부탁하셨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살면서 그 하루 일과의 맏물을 이처럼 주 앞에 앉을 수 있는 것으로도 나는 큰 은혜다. 맏물, ‘푸성귀 해산물 또는 곡식이나 과일 등에서 그해에 맨 먼저 거두어들이거나 생산한 것.’
누구는 죽기 살기로 출근길에 오르고 경쟁대열에 뛰어들고 미친 듯이 살아내야 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신 64:5-6).”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던가? 살아오면서 나는 그 속내가 여실하여서 더는 그러고 살기 싫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7).”
그런 목소리로 오늘 말씀을 읽는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오늘 하루 또 내게 두시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과 마음과 일과 연약함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일. 이와 같이 매일 한 날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두고 경배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복된 날이다.
곧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시쳇말로 인생 뭐 있나?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신 26:18).” 무엇이 가장 귀하고 또 중한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럼 되었다. 설마 누가 나더러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 한다면, 장애와 가난과 유약한 심성을 가지고 평생을 어찌 살아왔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아이의 사투를 응원하면서도 자꾸 살살하라고 권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자기 수고에 지치지 마라.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19)” 그러므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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