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봉석 2019. 5. 11. 06:40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27:8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시편 65:6-7

 

 

어느새 뚝딱, 한 주가 지나갔다. 주보를 만들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면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든다. 늘 그 일이 그 일 같은데 그때마다 다채롭고 소중하였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평안이다. 별 것도 아닌데 으르렁거리다보면 덩달아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날마다 한 날의 날들로 족한 것이다. 성경은 이를 엄연히 구분하신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57:21).” 풀어보면 자주 구설수에 오른다. 남의 일에 끼어든다. 뭐라 논하고 그것에 신경이 곤두선다. 정치가 그렇고 사업이 그렇다. 사는 일이 그렇고 밥벌이가 그렇다. 그렇다고들 하면서도 도무지 놓으려하지 않는다. 저에게 평강이 없는 이유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자꾸 나서서 휘말리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48:22).” 이는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그런 자를 악인이라 명명하였다.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강도질하는 것만이 악이 아니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게 악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나는 나의 한 날로 족한 것이다.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 하루의 수고로 족하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34).” 누가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누가 알겠나?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27:1).” 그렇게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가 아우성친다. 목소리를 높여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늘 발랄 명랑한 아내의 생일이었다. 나는 수제 초콜릿 한 상자와 어버이날에 받은 용돈 5만원을 봉투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딸애가 그걸 보고 돈을 좀 갖고 있지, 하고 혀를 찬다. 그러게, 언제부턴가는 돈이 따로 필요 없는 날들이 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고, 있지도 않지만 없지도 않은 나의 주머니가 놀랍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65:10).”

 

하나님이 만드셨다면 그 쓰임과 목적에 맞는 삶이 가장 유용하고 평안한 것이다. 즐거움의 찬송이 시편 23편이라면 그렇지 못한 시가 51편이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3:1-2).” 그런데 서로의 간절함이 다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51:1).” 쓰임에 소용없는 것이 죄다.

 

시인은 기도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2-3).” 그와 같은 괴로움의 탄식과 달리,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하는 노래는 엄연히 다르다. 다윗의 두 시는 대조를 이루면서 감사의 자리에서 주를 떠났을 때, 우리 영혼은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운가를 나타내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0-11).” 아침에 아이가 오고 아이로 글쓰기를 하게하고 책을 읽히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다, 아이가 돌아간 뒤 나의 이 사소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나의 일과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종종 아이를 내게 두심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느껴진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이 일이 그저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이겠으나 내게 두시는 하루였다. 감사를 알게 하시고 괴로움을 배우게 하신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이와 같이 시편 23편과 51편의 간격은 순종과 불순종의 골과 같고 주가 내주하심과 떠나계심의 간극과 같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나에게 두시는 한 날의 수고도 내 몫의 삶이 아니라 맡기신 이의 것이었다. 오후께 아이의 무사한 귀가를 확인하고 나의 하루도 정리가 되었다. 늘 나의 이야기는 나에게 맡기신 일의 방향을 제시한다.

 

어떤 일에 연연해하는가? 무슨 말을 주로 하는가? 누구와 어울리는가? 같이 어울려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혼자 있을 때 나의 모습은 비로소 나를 규정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바동거려봐야 같이 어울리는 자가 나였다. 말로 일삼는 품삯이 나란 사람의 관심이 되고, 어디서 맴돌고 무엇을 주력하는가하는 것이 고로 나의 실체가 되는 것이었으니!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이는 정하신 이치다.

 

이를 찾아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권세를 누려보지만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라. 그 권세가 10년을 가지 못하고 꽃이 붉기가 10일이면 족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즐거움이 되기 위해 얼마나 기를 쓰고들 사는지. 일련의 사회 사건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사람 참 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여실히 실감할 따름이다. 저들은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증거에 증거가 나와도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51:14).” 회개하고 돌이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참으로 귀하였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단 한 번도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말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27:8).” 말씀을 저버리고는 사람 구실도 할 수 없으니,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11:18-20).”

 

나의 하루를 돌아보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둔갑을 하고 일흔 번씩 일억 번이라도 용서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미움이 시기가 음란한 생각이 열등의식이 수시로 나를 넘어뜨리기 일쑤지만, 이처럼 아침마다 하루의 맏물을 드려 말씀 앞에 앉는 것이 가장 귀하였다. 어디가 아파도,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어디에 있다 해도, 결코 이와 같은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이 말씀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새기라.’는 그 의미와 목적을 알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으로만 나의 영혼은 평안할 수 있음이니,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65: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