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전봉석 2019. 7. 10. 07:14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삼상 4:5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더욱 악을 도모하고 의지할 수도 있다(삼상 4:6-9).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하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하면서 서로 결의를 다진다.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종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면서 더욱 완고하여져 싸움을 불사한다. 누구와 통화를 하다 내 곁의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을 떠났거나 멀리하고 산다는 데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요가를 다니고, 누가 교회를 그만 다닌다고 하니 미쳤나봐!’ 하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기 좋을 대로 산다.

 

그게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다. 전에 이야기 해주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요가를 다니고, 안 믿는 이들과 안 믿는 사람처럼 살면서도 교회는 꼭 가야하고 하나님은 무서워할 줄 아는, 희한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투하게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하고 온전하지 않은 자신을 두고 씨름하며 괴로워하는 게 맞다. 그러느라 애 쓰고 수고하기를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게 실은 내 의지나 의식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그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를 당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거저 얻은 것이지만 싸워서 확장하는 나라다.

 

이런저런 일로 누구와 길게 통화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혼인신고를 하고 하나님 앞에 바른 가정을 이뤄 살라고 말했더니, 자기 호적이 더럽혀지는 게 싫다(!)는 엉뚱한 대답을 들었다. 웃으면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뭐라 더 이을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2).” 그러니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죄다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유한마담들이라. 어울려 문화센터를 다니고 파전에 동동주 한 잔을 즐기고 취미로 무슨 점괘를 보면서. 나는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이와 하나님 앞에서 규모 있는 살림을 꾸리기를 말하다 이런저런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누가 무슨 병에 걸리고 어떤 사고를 당하면 이를 하나님의 징벌로 두려워할 줄은 안다.

 

오늘 본문의 블레셋도 같았다.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은 저희의 하나님이 어찌 행하시고 인도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결의를 다진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삼상 4:9).맞서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되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려 드는 것이다. 누구의 특징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살았다. 그 의식에 교회를 떠나면 안 되고 목사님과 척을 져도 안 되고, 나름 봉사하고 헌금하고 참여하여야 그 삶이 평안할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실은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해서 으레 그러려니 서로가 서로를 보고 위안을 삼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낼모레면 환갑인데 새삼 혼인신고를 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렇게 호적을 더럽히는(?) 게 싫은 것이다.

 

듣다보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 주로 그리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죄다 그런 식이라. 나도 가만히 돌아보면 안 믿는 친구는 없었다. 다들 목사 딸에 아들에 조카에 부친이 장로이고 누군 신학을 공부했으며 저마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출석은 하였다. 그러는 동안 우리에게는 분투가 없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분투는 당연한 것이라고 하신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어떤 사본에는, ('부모나' 아래에 '아내나'가 있음)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29-30).”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불편한데 하물며 자신과의 싸움이란 그리 녹록치가 않은 것이다.

 

열쇠는 순종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 순종은 겸손에서다. ‘요가에 대해 그 요망함을 설명했는데도 너무 그런 식으로 보지 마, 그냥 그 사람들 문화야, 운동하는 거지 내가 저들처럼 합장하고 인사하고 고개를 숙인다고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식이니. 우리의 안다고 아는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 수 있다. 그렇듯 당당함은 굳은 믿음과 초월한 신앙이 아니라 거만함이다. 겸손과는 거리가 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10:24).” 증명하라 이건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5-26).” 누구는 말하길, 너무 그러지 마! 한다.

 

말씀은 우리의 순종을 도우신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순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우리는 물론 공의를 집행할 수 없다. 공의를 위해 살지 못한다. 다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을 붙든다. 그 마음은 말씀을 의지한다. 말씀이 표준이 된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묵상하고 또 되새기는 일은 그래서 용이하다. 어떻게 누구는 고통없이 살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 궁리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0:27).”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스스로 설 수 없으나 하나님은 나를 세우시기 위해 넘어뜨리신다. 넘어지기 싫어 세상을 붙들고 늘어지면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신다. 혼인 신고가 호적을 더럽혀지는 일이라니! 하나님 앞에 서약하는 의미를 아무리 말해줘도 저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만다.

 

선생은 여전히 책을 홍보하듯 누구 책이 어디 방송에 소개된 것을 링크해서 보내고, 그러니 너도 써라! 하는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인지. 나는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있었다. 아이가 이따 병원에 말하고 글방으로 오겠단다. 오늘은 내가 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혼자 와도 되겠나, 걱정은 되지만. 그렇듯 나는 그저 내게 두시는 이 한 영혼으로 벅차다. 동시에 불안도 밀려오고, 장맛비로 어디가 아프고 또 고단한데, 이것이 분투다. 주께서 바라시는 게 무얼까? 주를 생각하고 주께 초점을 맞추고 주만 의지하려는 게 분투다. 성도의 분투란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형편과 사정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나의 고약한 성미나 성마른 성품까지도 내가 어쩌지 못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 그것밖에는 솔직히 다른 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아니, 그럴 여력이 내게는 없는 것. 그렇듯 분투란 죽기살기로 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0:20).”

 

그저 벌어지는 어떤 일에 호기심처럼 매료되어, 저들을 어찌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인도하셨는가를 아는, 앎으로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은 우리를 오히려 완악하게 할뿐이다. 뭐라 하려고 하면 적당히 하라는 식으로, 내가 하려는 말에 정색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씀은 듣기 싫고 행하여지는 어떤 기적, 귀신을 쫓아내는 따위의 일에 더 놀라워하는 것이다. 가정이 평안하고, 하는 일이 잘 되고, 만사가 형통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으니.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나는 다만 말씀만 의지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다른 게 기쁜 게 아니라,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22:1).” 이를 위해 분투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