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삼상 5:11-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사람들은 그저 소경이 눈을 뜨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눈을 뜨게 한 이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였다. 정작 소경은,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저는 눈을 뜨기 위해 아무 일도 한 게 없다. 의를 행하고 선을 구하며 어떤 헌신과 구제로 그 값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다만 앞을 못 보는 곤욕의 시간을 감당하였을 뿐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흔 살 된 앉은뱅이 이야기를 묵상하다 연관되는 말씀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 재차 묻고 확인하고 언급하며, 예수가 아닌 예수의 행하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되레 소경이었던 자는 답답할 따름이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
나는 앞에 앉아 일기를 쓰는 아이를 보면서 성경의 소경이야기를 생각하였다. 다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은혜와 은총을 구하며 저의 병 낫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덤덤히 그 생의 곤욕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드는 생각도 사람들은 저 아이의 병에 관심을 두고 어찌 되기만을 바라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도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지 하나님을 바라지는 않는 눈치였다. 누구는 같이 병문안을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저 안타까운 것이다. 누구는 자꾸 나에게 고맙다며 이 은혜를 어찌 갚느냐는 말까지 하였다. 나는 민망해하는 사도들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나의 하루는 그렇듯 요란하였다. 아이가 아침 일찍 오네 마네, 상담치료가 잡혀서 점심께 가네, 갈 때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이는 잘 왔는지, 오늘은 좀 어땠는지, 같이 있으면서도 이런저런 일들이 서로 얽혀 괜히 분주한 하루였다. 주로 사람들은 이를 가정의 문제로 돌린다. 저들 부모의 사연을 들어 그것을 원인으로 본다. 또는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또는 아이의 기질적인 문제를 원인으로 삼는다. 아무도 하나님의 의도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창조한 게 아닌 것처럼 아이의 저런 상태도 누구의 탓이 아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그저 우리의 관심은 아이의 상태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일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설왕설래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하고, 이번 의사는 어떤 사람이니까 믿어보자는 둥. 심지어 자꾸 내게로까지 은혜를 운운하여 나는 말했다. 아이가 아빠 이야기를 자주 한다.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면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시라. 대체 몇 번을 더 용서해야 하냐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시라. 왜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일흔 번씩 일만 번이라도 용서받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할 수만 있다면 용서하고 서로 받아주시기를. 아이를 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봐서라도. 이와 같은 답을 카톡으로 답해주었다. 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찮은 생각과 쓸데없는 고집을 다 허물어버리신다. 나의 자기아집을 흩어놓으신다. 그러기까지 쉬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들의 지적인 판단과 세련된 사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저들 잘났다는 사람들의 한심한 작태를 성경은 있는 그대로 나열하고 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8-19).”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오늘 날 이 사회에 펼쳐지고 있는 온갖 잡스러운 사건을 봐도 다들 나름 한가락들 하고 배울 만큼 배웠고 그동안 어디서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던 자들이다. 저들은 성접대 없이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고 뇌물은 밥이며 은폐와 거짓은 오히려 실력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방탕하고 부도덕한 삶에 빠져 하나님이 아닌 그 일,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길 스스로 알아서 믿고 아는 길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한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대중적인 가르침을 답습하는 사람들.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되뇌며 수고와 애씀을 성경 보고, 기도하고, 교회 가고, 구제하면서, 그런 조건으로 눈 뜨기를 바라고 일어나 걷기를 간구하는, 내 안에 그런 마음은 없었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대놓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안 믿는다고 공헌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나름의 열심을 마치 그 값으로 지불하는 듯이 기도하고 요구하는 사람들, 결코 성령이 아니고는 받지도 알지도 못할 일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은 따위의 죄가 아니다. 스스로 부한 사람들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 19:24).” 어찌 감당이 안 된다.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그것도 주가 주시는 능력으로 한다. 누가 더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나는 요즘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그 사람들에게까지 내가 무얼 어떻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이 아이 하나다. 그리 또 자연스럽게 글방에 오던 다른 아이들은 여름동안에 쉬기로 하였다. 중2 여자아이가 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엄마와 외할머니와 살면서 겪어내는 아이의 스트레스를 짐작한다. 스스로도 감정조절이 불가능해졌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 와 보라, 하는 말에 시큰둥할 뿐이다. 그런 거 보면 나의 장점은 내가 병약하다는 것이다. 달리 권하지 않고 기다리며 위하여 기도한다. 아내의 기도제목이다. 팔이 자꾸 안쪽으로 굽는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자꾸 걔가 마음에 쓰여. 아내의 말에, 우린 이제 그러한 마음을 주의 마음으로 이해한다. 똥싸개 아이가 더는 똥을 싸고 오지 않는다 싶었는데 갈 때마다 엘리베이터나 복도 벽에 오줌을 싸면서 간다. 어떻게 해야 해? 아내는 가정예배 전에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세상이다.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그 곤욕이 딱하다. 얜 또 태국인 엄마라 말이 안 통하고, 아빠는 윽박지르며 애를 자꾸 때리고, 그게 훈육이고 그래도 부모의 사랑이라는데 뭐라 할 말은 없고. 6학년 여자아이가 수업 중에 발작을 하듯 지랄을 떨며 욕을 해대고 발광을 부렸다. 그 엄마의 지나친 참견과 아빠의 잔인한 침묵이 아이를 벼랑 끝에 서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들은 말로 부모에게 뭐라 언급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맡기시는 이의 선하신 뜻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그러자니 우리 속도 말이 아니어서! 아내는 저녁이 되면 곤죽이 된다.
이 동네만 유별난 게 아니라 모두는 죄악으로 인해 아우성이다. 고스란히 그 짐을 아이들이 도맡은 셈이다. 나름 의를 다한다고 하면서 부모로서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은 별 문제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를 얼마쯤 더 겪어야 알까? 온갖 고초를 겪는다고 겪어본들 알기나 할까? 더더욱 무장하며 완고해지는 사람들의 본성에 대하여 나는 이제 신물이 난다. 더는 내 의지나 노력으로 어렵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왜 그랬는지, 그게 왜 유익인지, 이제 조금은 알겠다. 내 의지 내 노력으로는 아니다. 오늘 성경은 이를 일깨운다. 감히 주의 궤를 우상화하면 화를 당함이다.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누구 하나가 아니다. 자자손손 고초를 겪는다.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사는 게 죽을 맛이라.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말씀 앞에서 섬뜩하다(삼상 5:11-12). 단지 저들은 이방민족으로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이어서 그렇겠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자기 이로움을 좇고 간구하고 의지한다면, 다곤 신전 앞의 여호와의 궤라. 그 고통이 자신들뿐 아니라 자녀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다. 우리 지혜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그러므로 우린,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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