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전봉석 2019. 7. 14. 06:54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삼삼 8:20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말품을 팔며 산다는 일은 참 어줍은 일이다. 아들이 일시 귀국하여 일처리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자신 명의의 핸드폰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불폰을 알아보느라 아래층 매장에 들렀다. 그런데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대어 설명이 길어졌다. 된다 안 된다, 뭐는 어떻다 하면 될 일을, 입바른 소리 뒤에는 어떤 이문을 남기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두 곳을 들러 알아보다 전혀 다른 데에 가서 했다. 그냥 간단하게 유심칩 만원, 충전할 요금 얼마, 이렇게 간단한 일을 구구절절 말을 이어가는 속내가 다들 있던 것이다. 의외로 너무 간단한 일처리에 문득 허비되는 말의 소모에 대해 생각하였다.

 

특히 누구에게 말씀을 전할 때도 어쩌면 우리는 안 해도 될 말에 대해서 너무 오랜 시간과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자꾸 하나님에 대해 말하느라 정작 하나님은 없다. 그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과 안자하심을 설명하느라 실제 하나님보다 자신의 체험이나 개인적인 견해에 너무 치중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항상 어떤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주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지. 그러다보면 정작 했어야 하는 말은 없고 공허한 말뿐이거나 자기자랑에 빠져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조차 잃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가를 내세우느라 정작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뒷전인 것이다. 겨만 무성하고 알곡은 없는, 자신의 무용담이 말씀을 능가하는. 종종 그래서 나는 말들과 말들 사이에서 허방다리 짚는다. 하고 나면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닌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훔쳐 자기 말로 바꾼다.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23:30).” 꿈이나 환상, 어떤 경험에 대한 말들은 그래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는 자신과 하나님은 남다른 관계인 것처럼, 자기 경험을 높이 두는 경우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1).” 대놓고 누가 누굴 대신하여 말씀을 받았다는 식의 언사는 몹쓸 짓이다. 여전히 대언자를 운운하며 자기네 목사님이 기도를 하다 자신에 대해 말씀을 받았다는 식의 표현에는 오금이 저린다. 심지어 꿈을 수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데 있어 실은 하나님만 남는다.

 

자신의 지나온 시간이나 남다른 경험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기까지 소멸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오랜만에 아들이 오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데 있어, 앞서 두 핸드폰 매장에서 쓸데없는 설명과 그 속이 빤한 친절에 넌더리가 나서 그런가? 나는 자꾸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빙충맞기만 했다. 오후께 아버지가 오시고 서로 간 모처럼만에 안부를 묻고 인사가 오갔다. 그리움은 먼 데 있고 정겨움은 가까운 데 있다. 아내는 삼계탕을 준비하였고 딸애는 분주하게 일이 많았다.

 

종종 우리가 견주어 세상을 바라본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삼삼 8:20).”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여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굴다니! 우리 하나님은 가까운 데든 먼 데든 어디에든 계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23:23).” 멀고 가까움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통화로만 하고 늘 먼 데 있는 줄 알았는데 아들이 네댓 시간 만에 왔다. 곁에서 같이 잠든 아들의 모습이 신기하면서 낯설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보지 말고 살아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떠나라고 하시지 않고 닮지 말라고 하셨다. 늘 나의 기도는 먼 길을 돌지 않기를. 항상 곁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잠깐 친구들 만나러 나간다는 녀석에게 너무 늦지 마라, 하고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5).” 누가 선하고 악한지 우리가 판단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공의를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개인의 성향이나 기호를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정치적인 이야기나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와 논쟁을 피한다. 해봐야 소용없는 말이다. 하나님은 어느 쪽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이시다. 다만 내가 나를 쳐 복종하게 하였다는 바울 사도의 직언이 귀하다. 모름지기 교단에 따라 또는 그 기질에 따라 말씀을 전하는 성향은 다를 수 있다. 정치적인 신념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7).” 하나님이 하신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저들은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삼삼 8:20).”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누굴 뭐라 할 게 아니라, 나 하나 바로 서는 일이 중요하다. 늘 돌아설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구더러 뭐라 할 거 없다. 저를 빗대어 말하다 보면 늘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같이살라고 하신 게 아니다. 오롯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남 볼 거 없다. 군더더기 같은 소리를 더하며 과장하다보면 왜곡되게 되어 있다. 다만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말씀 앞에 묵묵할 수 있는 게 복이다. 23년 동안 꾸준히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며 알 것 같다.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25:3).”

 

더더욱 드는 생각이 무던함인 것 같다. 누가 뭐라든지,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126:2).” 가만히 지나온 날을 돌아볼 때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고, 오늘에 두신 모든 것들도 어느 것 하나 주의 사랑하심이 아닌 것이 없다. 종종 아내가 나에게 핀잔하듯 말하기를 우리가 엉터리로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갚으셨다! 이를 알면 알수록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뿐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말씀하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나는 내 큰 능력과 나의 쳐든 팔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노라(27:2, 5).” 내게 두시는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를 따르는 길.

 

아무리 세상이 어떻다 해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23:36).” 말씀 앞에 경고를 듣고 늘 주 앞에 온전할 수 있기를. 저녁을 먹고 아버지와 나는 아픈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주께서 어찌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맡기신 이의 뜻을 구하였다. 어떤 견고한 것도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연약한 것도 건재하게 보호하신다. 고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주가 선봉에 서신 싸움이다. 주만 바라자. 주의 멍에를 메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주를 바라고 주의 길을 가는 게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 땅에서 이보다 쉽고 가벼운 일은 없는 것이다. 새삼 아들의 평안함과 딸애의 순종됨이 감사하였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12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