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전봉석 2019. 7. 15. 07:12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삼상 9:1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섭리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돌보심이다. 이를 위해 보존하고 협력하고 통치하신다. 하다못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6:26).” 또한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우리가 안달하고 복달해서 될 게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의 채찍과 훈계라 해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만큼 훌륭하게 자라고 살아가게 하지 못하다. 마음을 졸여 조급해 하며 애를 태운들,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조성됨을 묵상하면 놀랍다. 더욱이 불안증을 달고 사는 나로서는 괜한 것으로 두려워한다. 닥치지도 않을 일을 알면서도 염려한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일뿐인데.

 

그처럼 하나님을 배신하고 왕의 통치를 원하는 백성에게 사울을 세우신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삼상 9:17).” 우리의 그릇된 것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그러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6:27).”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조성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전에 알고 의지하였던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새로운 것이다. 모든 게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같이 했다. 전날에 어머니의 지난날들에 대한 이야기 때문인가? 어릴 때 죽을 것으로 간주하여 기도원에 내다버릴 요량이었던 막내 목사는 새삼 어엿해보였다. 전심으로 주께 맡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나의 부모가 우리 형제들을 돌보고 대하였던 데서 새삼 배운다. 주께 쓰임받기를 바라셨을 뿐, 이 땅에서의 일에 대하여 부모로서 바람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창조하셨고 조성하시며 불러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는 가족들을 볼 때면 늘 새삼스럽고 놀랍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가령 교회에서도 한 아이로 인해 모두가 배운다. 달라지는 것이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자세가 바뀐다. 구하는 내용도 새롭다. 전날에 외박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쉰 아이는 늦지 않고 예배에 나왔다. 아이의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가 알고 돌보는 마음이라, 다른 아이도 마음을 쓰고 쓰이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배 후에 잠깐들 같이 당구장엘 갔다. 돌보고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게만 새로운 게 아니었다.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아이는 아이 병원으로 복귀하는 것을 봐주고 돌아갔다. 흔히 아이의 상태로 모두는 염려하지만 아이 하나로 모두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운 것이다. 이로써 협력하게 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내 의도나 의지가 아니다. 그리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통치다. 다스리심이다. 나는 문득 막내 동생의 목회 이야기에서 그것이 어떠하든지, 살아서 사는 날 동안을 주 안에서 헌신할 수 있음이 새삼스러웠다. 나야말로 두 말 하면 잔소리고, 난 무조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자녀 넷을 바쳤다. 어머니의 말에 아내와 딸애는 그 말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가 이루신다. 내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길이 없다. 알지만 알면서도 안달복달이니 내 안에 두시는 불안마저도 주께서 사용하시기를. 아이와 같이 있는 동안 온 신경이 아이에게 쏠려 긴장하다 아이가 돌아가면 기진하는 내 모습을, 그것으로도 주의 섭리는 동원되어 다스리시고 구속의 목적으로 이뤄가고 있으심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순종을 뭔가 절도 있고 규격화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모호한 표현이지만 그냥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그게 헌신인지, 희생인지, 봉사인지, 실제 그 생활은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도 무슨 대단한 기운이나 염력 따위로 여겨서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니다. 늘 내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중심을 이루는 것. 저 아이가 주일이라 예배를 소중히 하며 성전으로 나아오는 길. 서로 아이를 보며 주의 사랑을 구하고 의지하는 마음. 이 모든 게 곧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단지 측은지심이 아니다. 불쌍히 여겨 구제하고 돌보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자기 하나 구제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이 길이 맞나? 이걸 해야 하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따위로 고민하지 않는다.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면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그 결과도 하나님 것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147:8-9).”

 

오늘 시인은 이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27:1).” 우리가 세우는 집을 바라시는 게 아니다. 주가 세우시는 집에 거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무슨 사역을 거창하게 이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다. 주가 이루시는 사역에 우리로 협력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게 하시려고, 때로는 어려움도 실패도 좌절도 허용하신다. 내버려두심으로 그 답을 제시하신다. 나는 종종 우리 형제들이 모두 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우리 부모가 얻은 가장 귀한 복이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하나님 맘대로 하십시오! 나의 어머니의 결연하였던 길을 나는 안 듣는 척 하면서 듣고 마음에 두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니!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가? 내 뜻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일방적인 길이라면?! 그렇다 해도 주가 세우지 않고 지키지 않으시면 모두는 허사인 것. 바로 그 집에 내가 사는 것이 순종이다.

 

고작 나는 한 아이로 씨름하고 쩔쩔매고 내가 볶여 설사를 하고 슬그머니 안정제를 삼켜야 하는 일이지만, 것도 주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니. 무슨 수로 그 길을 찾아 그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을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신앙은 결코 모호하거나 몽환적인 의지가 아니다. 순종은 결연한 구호나 굳은 결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하다. 나를 죽이셔도 주의 사랑이라. 그가 내게 고통만 더하신다 해도 주의 마음이라. 왜냐하면 그는 항상 선하시며 인자하실 뿐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그의 숨기신 마음을 헤아려 알기까지,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 다른 길은 없다. 세상으로 가거나 주에게로 돌아가거나,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우리로서는 다만 주의 영광이 세세에 있음을.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