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7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온전하여서 뭐라도 좀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새삼 드는 걸 보니 내 안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가보다. 나 같은 자에게 왜 하필! 나는 아이의 안타까움을 두고 나를 자책하듯 신세한탄에 가까운 자괴감에 휘말렸다. 이런 마음의 원인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아이는 조울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났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힌듯하였다. 감정의 지배는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이 되어 점심으로 먹은 것이 얹힌 듯 울렁거려 아니나 다를까 설사를 하고 금세 속이 볶여 울렁거렸다. 지금의 이런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본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화장실에 앉아 슬그머니 안정제를 마른입으로 삼켰다. 하나님의 명령은 종종 나를 먼저 힘들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멍들게 하시면서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신다.
사명자는 사명에 앞서 혼자 두시고 괴로운 날을 감당하도록 단련하신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2:3-4).” 다윗도 다윗이기 전에 다윗의 광야로 내몰리는 신세였다. 모세는 주의 일에 앞서 홀로 미디안 광야에서 그 기운을 다 빼야 했다.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어떤 외로움이 아니, 두려움이 나를 볶아댔다. 아이는 방언 터진 사람처럼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그의 입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았고, 그런 자신의 하고 싶은 말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쓰고 또 썼다. 허공에 대고 손동작을 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사로잡히는듯하였고 같은 병실의 ‘두 형’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고 싶어 했다. 자기주장을 위해 능청을 떨었고 다른 말로 앞의 말을 덮어버렸다. 이를 제지하거나 지적해주면 불쾌감을 드러냈고 울고 싶은 아이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보였다.
뜬금없이 성경 어디를 읽어보라 하고 성령이니 영성, 임재니 권능, 계시와 영접, 하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말을 도모하였다. 그런 표현은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자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답답해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일까? 누구 말처럼 남들이 들으면 글방에 다닌다더니 거기 목사가 이상한 사람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평상시 언어를 사용해서 일상적인 언어로 글을 쓰고 말을 하게 하여도 아이의 엉긴 언어구사는 그야말로 영적인(?) 표현들로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무엇이 보이고 어떤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며 그런 자신을 왜 알아보지 못하는가하고 답답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가령 스물다섯 살 같은 병실 어떤 형의 팔을 자신이 잡았을 때 힘줄이 돋고 피가 돌면서 오른쪽 얼굴에 광채가 나더라고 하면서, 무슨 말 하는지 알겠죠? 하면서 열성을 다해 어떤 의사표현을 하려고 하였다. 나는 불안하였고 두렵기까지 하였다. 약을 줄였고 지금의 약에 조울증 증상을 더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들었다. 누구는 2주는 지나야 그 약효를 알 수 있을 거라 하였다. 하긴 공연히 입원까지 시켜서 병원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아이는 서너 시간 글방에 있다가 돌아갔다. 가기 싫어하는 것을 달래며 다독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주저앉아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에게’ 하는 회피의 언사로 괜히 마음을 부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고 회피다. 한동안 그런 마음에 사로잡혀 목사가 되는 것에 뒷걸음질 쳤고, 아이들과 예배하고 교회를 이루는 데 변명으로 삼았다. 문득 내가 좀 더 능력이 있는 목사였다면 어땠을까? 이럴 때 아이와 그 엄마, 가족들을 휘어잡고 카리스마 있게 딱 이끌 수 있다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회피구나. 도망치고 싶은 것이구나. 하기 싫은 것이야. 나는 나의 기질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항상 내게 말씀으로 붙드셨고, 어김없이 나를 자리에 앉히셨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나는 무엇을 보는가? 상한 영혼의 아이와 아이엄마를 측은히 여겨 동정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하는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 너머에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보고 한다. 아이를 보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27).”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이를 위해 나를 세우신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아이를 세우신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33).”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게 능력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 있어 믿음으로 하는 것이 능력인 것이다. 나라를 이기고 사자의 입을 막는 권능의 행위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나의 무용담을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와 있으면서 어려웠던 마음이 설사로, 뒤틀리는 속앓이로, 밀려드는 불안으로 엄습한다 해도 이 일을 하고 안 하고는 내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다만 믿음으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 새 힘을 얻는다.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누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가? 조금은 나아지려나 하는 안이함에 사로잡힐 일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럼에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가 다 도모하시는 일이었다(38-39).
오늘과 내일은 아이가 오지 않는다. 아들이 내일 다시 출국하여 아내와 딸애도 휴가를 내고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하였다. 어디로 좀 나가기에는 내가 너무 병약하다. 그리고 아들도 딸도 이참에 치과며 안과며 병원을 좀 다녀오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저런 일정이 나에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라. 남들은 좋은 시간이라는 걸 나로서는 힘든 것이니, 어쩌겠나? 오늘 말씀은 어수선한 나의 마음에 일침을 가하시는 것 같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7).”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다만 기회를 따라 행할 뿐이다.
일련의 모든 일들은 징조다. 지혜의 소리다. 외치는 자의 말이다. 말씀 앞에 가만히 귀 기울일 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오늘 나의 복은 이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어디 멀리 뜬구름 위에 있는 게 아니다. 남의 말, 누구 이야기에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성경이 아무리 하나님의 귀하신 말씀이면 무슨 소용인가? 그저 박물관에 걸린 고귀한 보물이면 뭐 하겠나 말이다. 오늘 말씀이 사울이 나다. 사울에게 그 말을 전하는 사무엘이 나다. 성경은 온통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뿐이다. 아무리 믿음의 사람들이 위대하였다 한들, 그것이 나를 향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무슨 이익이 있겠나!
고로 오늘 저 아이의 이런저런 사연이 그 고달픔이 그저 안 됐고 불쌍하고 측은한 사실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온전히 이는 날 위한 하나님의 조성인 것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고로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부디 말씀을 따라 묵묵히 걷자.
여기 두시는 이가 또한 행하실 것이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2:1).” 주가 이끄시는 대로 하자. 나는 없고 내 안에 주의 말씀으로만, 이에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감추어지기를.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곧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 이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3).”
주가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복이 그 증거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0) | 2019.07.18 |
---|---|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0) | 2019.07.17 |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0) | 2019.07.15 |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0) | 2019.07.14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0) | 2019.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