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전봉석 2019. 7. 23. 09:0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 17:45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135:6

 

 

종종 나는 의사의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좌절한다. 그저 잘 건사하고 살라는 소린데, 주신 이의 의도와 그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럴 때는 하나님에 대한 망상이 여지없이 깨진다. 이렇게 하셨으면 저렇게 해주실 거야, 하는 따위의 당위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해주셔야 한다는, 이를 마치 하나님의 의무인 것처럼 바라고 구하는 것이라니! 우리 영혼의 황폐함은 하나님의 실망을 내포한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 이것이 우리의 낭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9).” 곧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지옥이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새벽에 일어났다가 저녁에 먹은 진통제 때문인지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도로 들어가 누웠다. 고통 중에 주를 바랄 수 있다니!

 

참 자유란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응할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은 열심을 품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 곤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난감해하시는 증거다. 내가 더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우상이고, 그래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가지고 달음질하는 것이 미신이다. 그 가운데 나의 교만은 곧 괜찮을 거야! 다 좋아질 거야! 하고 나의 열심을 부추긴다. 거기에서 자유를 잃는 것이다. 자기 속도에 자신도 주체를 못하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엄연히 지적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06:15).” 이내 원하는 것을 얻고도 그 영혼은 쇠약해지는 까닭이다.

 

지팡이에서 혹시 몰라 이제는 휠체어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마음은 어렵지만 그 또한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의 진정한 자유란 난감하고 답답하기만 한 현실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족할 줄 아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열매란 무엇일까? 그저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의 외형이 아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15:2).” 이파리는 나무 자신을 위한 것이고 열매는 남을 위한 것이다. 나의 상황에서 열매는 무엇일까? 그저 풍성하고 푸르른 이파리로 족한 것은 아닐 테고!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15:8).” 나는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송구할 따름인데,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다만 주를 의뢰하며 주께 붙어 주 안에 거하는 것. 나는 앉았다 섰다 서성거리다 물러서며 주시는 하루에 족하였다. 솔직히 그러할 수 있기를 주께 간구하였다. 아프면 아픈대로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당장 서러워 어디가 아픈 것에 정신이 팔리고 신음할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 이와 같이 간신히 의자에 앉아 주의 말씀을 붙들 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그렇구나! 내게 있는 것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뿐이었다. 곧 내 안에 두시는 참 자유란, 그리고 진정한 열매란, 주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허리가 아파 오래 앉지 못한다. 서성이는 일도 어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생각하되 주를 사랑함으로 저를 사랑하는 일. 아이엄마의 이런저런 결정에 답답해하다가도 주의 마음으로 저이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고로 이렇게 주신 날, 그렇게 두시는 날, 이 모든 게 주의 전능하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의뢰하는 일.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135:6).” 말씀대로하면 오늘 내게 두시는 육신의 연약함도 마음의 우울함도 그 조바심까지도 모두 주가 다루시는 것이다. 주가 거기에 두시는 것이었다! 곧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이 모든 것을 주가 행하시도록 내어맡기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 하고 돌아앉거나 서거나 서성거리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위경련을 진정시키면서 나는 그리 구하였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소서. 다른 무엇을 바랄까?

 

우리의 열매란 주를 바라고 주만을 찬송함이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135:1).” 때로는 나의 현실이 마뜩치 않아도, 괴롭고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소리가 나를 억누른다 해도,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