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전봉석 2019. 7. 24. 07:08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삼상 18:12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4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2).” 우리의 능력이란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게 생활이 나를 노엽게 한다 해도 우리가 자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누가 구약을 새로 읽으면서 율법이 새삼 귀하고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서 우리의 참 자유함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가령 술을 마시고 다닐 때는 음주운전단속이 구속 같더니만 더는 술을 가까이 하지 않고부터 그와 같은 단속이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임을 알았다. 죄를 멀리하고 미워할수록 율법을 소중히 하고 가까이 하게 된다. 자유함이란 풀어놓은 방임이 아니라 정해놓은 방침이었다. 이를 오늘 시인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기본 명제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안다. 모르는 척, 잘 믿고 의지하는 척 해도 자신 안에 하나님께로 행한 의뢰가 순응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기어이 자기고집을 꺾을 수 없고 꺾기 싫어한다는 것을. 아니, 우리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피하고 숨고 숨기는 존재가 되었다. 주님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15:3).”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그만큼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다. 곧 우리의 자유함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야지! 하는 의지다. 그럴 수 있는 용기다. 오늘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내가 주께 의뢰하겠다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며칠째 진통제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더니 오늘은 한결 좀 살겠다. 어제 아침에는 연달아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가, 속이 뒤집어지면서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와서 두려웠다. 가만히 도로 침대에 누워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럴 수 있는 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나의 완고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대항이다. 물론 육신의 고통은 괴롭다. 슬픔은 달갑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어떤 슬픔이나 고통이나 근심도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다. 다만 그러한 허용 가운데서 주의 뜻을 바로 알고 의지할 수 있는 게 우리에게 두시는 고귀한 의지다. 곧 택하심과 은혜는 다르다. 곧 택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혜는 나의 선택에 따라 그 통로가 막히기도 한다. 그러니 늘 욥의 고백이 진귀한 것이다. 죽이신다 해도 주께 자신의 행위를 아뢰겠다니! 그만큼 주만 바라고 의지하겠다는 것인데, 은혜의 통로란 실제의 죄를 주께 아뢰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는 일이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여 누구는 더욱 완고하여질 때 누구는 순종을 배운다.

 

곧 내가 의지하였던 것들로부터의 버림당하는 것이 은혜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게 지혜다. 그럼에도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하는 한,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29:6).”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세상을 의지하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과 조언을 따라갈 것인지.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36:6).” 내게 한 가지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는 누구를 어떤 이의 경험과 조언을 우선하지 않는다. 나의 골방에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위로가 크다. 설령 아무 것도 내 뜻대로 이뤄주시지 않는다 해도,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4).” 그리니까 오히려 내가 예측하고 예단할 수 없어 감사하다. 나의 생각이 번번이 틀리고 엇나가서 다행이다.

 

이러하니 이렇게 해주실 거야!’ 하는 나의 망상이 깡그리 무시되고 깨질 때가 오히려 감사하다. ‘거봐, 내가 그러실 줄 알았어!’ 하는 것은 곧이어 교만이 따르게 돼 있다. 사울은 다윗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이다. 자신이 그만큼 한다고 했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뤄주실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을 통치하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 18:12).” 저는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고 아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상대적으로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14).” 견주어 다툴 상대가 아닌데 공연히 시샘하고 멀리하는 까닭은 하나다. 그 안에 수치심이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자신은 알고 있다. 정말 무서운 일은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시는 것이다. “나라 가운데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나라들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나라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29:15).”

 

나는 나의 병약함으로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어서 특별한 은총으로 이해한다. 전에는 누구의 동정이나 불쌍히 여김을 부끄러워하고 자존심상해 했지만,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 가면서 시므이에게 저주를 들을 때 다윗이 취했던 행동이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모습이란 것을 새삼 확신한다.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삼하 16:8).” 하면서 시므이가 저주하는,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7).” 저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으나, 다윗은 말한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하면서 그 부당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10).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겠지만 우리의 자유함이란 그럴 수 없는 중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남과 다른 것이다. 오늘 아침, 며칠 만에 조금은 나은 자세로 앉아 묵상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주의 은혜를 찬송한다. 찬송할 수 없을 때 찬송하려 한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

 

물론 내 안에는 늘 우울과 서운함과 서러움과 어떤 자격지심이 들끓는다는 것을 잘 안다. 순간 욱, 하고 어떤 분함이 또는 억울함이 나를 엄습할 때는 사울의 창을 내던지고 싶은 욕구가 인다. 늘 저 두 자기의 싸움이다. 나는 오스왈드 목사의 <에스겔>을 읽고 이어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에스겔서강해>를 주문하여 읽었다. 저들의 말은 하나였다. ‘우리에게 변함없이 필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의 통로가 막히지 않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내 생각과 내 고집이 우선할 때는 어림없다. 그러는 동안은 홀로 지고 힘에 겨워 뒤뚱거려야 한다. 별 수 없는 논리다. 50%를 맡겼으면 50%는 짊어지고 사는 수밖에. 나는 언젠가 필리핀 동생이 해주었던 말에 크게 공감한다. 맡길 수 있다면 전부를 맡기고 사는 것이 축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 우리 안에는 늘 우리 스스로를 우선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주를 믿는다 하고 실제로는 자신의 죄를 덮어버리고 묵인하려고 드는 이상 참 평안은 그 안에 없다.

 

신세한탄으로 서러워 흘리는 눈물을 통회의 눈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푸념을 회개로 아는 인식도 있다. 실컷 울고 후련하다고 여기는 것을 주의 평안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끔찍하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정작 그 마음을 찢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오늘 시인도 그와 같은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3-14).” 말씀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게 참 귀한 은혜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1).”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3).”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