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전봉석 2019. 7. 28. 06:55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편 140:12

 

 

기어이 살아서 생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저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까지 주신 목숨을 참고 견뎌냈던 것으로, 오늘 본문은 놀라운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한다. 곧 다윗을 무시하며 업신여겼던 가족들이 찾아와 저에게 의탁한다. 뿐만 아니라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 무려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되었다. 그 어떤, 쓸모없는 생명은 없다. 저를 지으신 이가 저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저의 고백은 놀랍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40:12).” 괜한 일이나 엉뚱한 사이는 없다. 한 사람을 마주하고 저를 마음으로 대한다는 일은 그리하여 값진 일이다. 결국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닌지를 알겠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성전에서 사는 게 귀하였다. 결국 에돔 사람 도엑은 다윗을 밀고하고 그로 인하여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의 생도들 85명이 저의 손에 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 중 한 이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와서 그 모든 사실을 알린다. 다윗이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삼상 22:23).” 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함이다. 어떻게 주가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그리하여 다윗의 사람들과 그의 세력이 형성되어져 가고 있었다.

 

그저, 괜찮다. 평안하다. 다 잘될 거다. 하는 자들에게는 주의 진노가 따를 뿐이다.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13:10).” 막연한 희망과 기대는 하나님을 저버리게 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우리에게는 엄연히 주의 이름이 있다. 주께서는 그 이름을 위해서도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나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도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이는 곧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106:8).”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2:14).” 그리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실 것이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토요일은 길고 조용하였다. 작성한 설교원고를 다듬고 아침에 쓴 묵상글을 다시 읽다보니 아침나절이 금세 지나갔다. 점심께 아내가 나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영화 <나랏말싸미>을 보러 갈 거였는데 취소하였다. 오래 앉았기 어렵고 한참 걷기가 불편하였다. 모처럼 햇살이 따가운 오후였다. 대신 공짜로 올라온 <어린 의뢰인>을 보다 울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어린이 가정폭력의 80% 주범은 그들 부모였다. 그저 왔다 저처럼 허망하게 그 부모 손에 맞아 죽기도 하는 생명에 대하여 나는 참담하였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란 표현처럼 여러 사회가 그 안에 함축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속되고 덧없으며 치졸하고 악랄하다. 하나님이 빠진 모든 이야기에는 절망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삼상 22:23).”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품은 저가 곧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 주 안에서 늘 온전하며 반듯하기를. 아이는 일요일에 봬요. 하고 온전한 문장의 글을 주었다. 좀 어떤지 궁금하였지만 엄마와 가족들과 같이 있다고 하여 연락하지 않았다. 모든 게 주의 섭리다. 그의 뜻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 심지어 어떤 모순도 과오도 다 선을 이루실 것이다. 그에 따른 시간과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온전히 자기 몫이라. 그 선택이 때론 막중하고 두렵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는 일처럼, 영화 한 편이 주는 여러 이야기 속의 교훈은 크다. 늘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같다. ‘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 여기서 상충되는 시간과 거리가 고난이다. 마르바던의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두시는 이유가 다 있다. 사탄도 그 의미다. 쓰임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고로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어떠하든 온전히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하며 사는 것이 복되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140:4).”

 

그러므로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