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4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편 142:1-2
좋은 기회다. 따르는 사람들의 말이 맞다. 모두의 의견이 옳다. 그렇다 해도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삼상 24:5).” 하는 이와 같은 마음을 나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증거로 본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그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오히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른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6).” 이와 같은 마음이 오히려 너무 예민한 걸까? 이를 다윗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사울은 어쩌다 저렇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일까? 보면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 때문인 것을 성경은 일관성 있게 드러내어 보이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에덴에서 쫓겨났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죄로 인해 자기들이 살던 땅에서 홍수로 죽었다. 야곱은 그 죄로 밧단 아람 라반 삼촌의 집으로 쫓겨 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악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은 뿔뿔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쫓겨 다녔다. 이는 모두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저 상징이나 기호가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마 22:12).”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나니,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그러므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앞서는 그렇듯 형벌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돌이킬 수 있었다. 남겨진 자들도 있었다. 용서의 길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를 볼 것임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 앞에 우리 안에 두려움을 두시는 것이 오히려 복되게 감사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신 4:27-28).” 그것이 오늘 날 이 사회의 증상 아닌가?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주 앞에 돌이키는 단서가 되는 것들. 아이의 상태는 조금 호전이 되었는가, 사용하는 언어와 말의 문맥이 조리 있게 연결되었다. 아이엄마는 내게 고마움을 돌렸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권하였다. 모두의 기도가 많다. 이참에 주께 온전히 돌이켜 참된 치유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대귀의 <나는 진정한 치유를 바란다>는 찬양을 보내주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맘
원인도 모르는 적개심에
흐르는 눈물 꼭 참아 가슴에 묻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억울하디 억울한 일들에
비통한 맘을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네
깊고 깊은 상처보다
더 깊은 그 나라의 치료가 필요해
어설픈 위로와 축복 사랑의 말들보다
나는 진정한 치유를 바란다
...
이렇게 이어지는 노랫말이 저이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오늘 시편의 노래를 다윗은 광야의 어느 굴속에서 지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1-2).” 우리가 누굴 붙들고 의지하며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인가? 나는 아이로 인해 아이엄마가 짊어지고 가는 그 세월이 무거워 눈물겨웠다. 그것이 저의 안에 분노와 적개심과 비통함 때문이란 것도 잘 안다. 단지 아이가 호전되어 치료를 받는 것으로 그칠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진정한 치유를 바란다.’ 하나님은 엄연히 소멸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곧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고 원통해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우리는 누구나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결코 스스로는 그 빛 앞에 설 수 없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단지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그 덕을 돌릴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오히려 주를 보고 살 수 있는 죄인은 없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왜냐하면 하나님도 결코 패역함을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전부가 아니다. 그 어려움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곧 우리들로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그 끔찍한 일에 대하여 성경은 누누이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그러니 두려워 떨며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 수 있는 자가 복되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
아내는 늙으신 모친을 모시고 피서를 떠났고 나는 글방에 남아 여전하였다. 돌이켜 가만히 생각할 때 가장 끔찍한 형벌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었다. 하나님을 거슬러 죄로 벗 삼아 사는 일이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돌아가는 세상 이치가 그러하였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거기에 맞추어져 있었다. 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그 쫓겨남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세계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부디 ‘아이의 일’이 실은 아이엄마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나에게 저들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아 주의 음성으로 보여지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그러므로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시 142:1).” 그럴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러기를 바라며 권해주는 이가 있을 때가 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19).”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사울 또한 다 안다. 다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저의 마음이 지옥인 것이다. 살아서 지옥을 사는 이 시대에 우리로 ‘그 나라의 치료’가 필요한 것을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지기를. 비로소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2).” 우리가 누구로 위로를 삼을 것인가?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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