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삼상 20:11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편 138:7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로 주의 사랑을 더욱 알게 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하나님이 고약하신 게 아니라 사람의 천성이 고약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싫어한다. 나무 뒤에 숨고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가린다. 죄로 인한 본성이다. 좋을 땐 무심하던 것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로소 주의 손길을 그리워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23:6).” 이 놀라운 고백이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고난도 허용하신다. 결코 하나님이 만드신 고난이 아니다. 사람이 자초한 일이다. 사랑하신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없던 일로 한다면 그게 더 온당하지 못하다.
종종 하나님의 이율배반적인 사랑과 공의의 상충되는 부분에서 오히려 더 큰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오전 일찍 누가 왔고 어떤 일로 교회의 증명을 원해서 그리 해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두고 혼자 고민하고, 공의를 내세우다 그만두었다. 대신 이와 같은 갈등을 그대로 설명하였고 그러므로 다시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하나님이 어찌 다루실지 누가 알겠나? 이어서 누구와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삼상 20:11).” 믿는 자들의 교제는 주 안에서의 위로다. 주의 사랑을 저를 통해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시 138:7).”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점심을 먹고 아무래도 아이 병원엘 다녀오게 되었다. 자꾸 그리 마음을 두시는 데는 더는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평소보다 안정제를 한 알 더 먹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출발하였다. 병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아이가 감기까지 걸려 긴 바지를 원했다. 마침 누구 줬는데 안 입고 있던 추리닝이 있어서 그걸 들고 갔다. 이번 주간이 가장 고비라고 들었다. 약이 잘 들으면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꾸준하게 치료하면서 가면 될 일이다. 무슨 프로그램에 참가해야 해서 아이 손을 잡고 기도만 해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계속 마음에 아이 병원비 걱정이 되고, 교회에서 얼마라도 좀 보태주어야 하는데. 마음만 그렇지 어쩌나,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로 친구가 전화를 하였고 같이 생각하며 기도하던 일이라, 친구는 얼마 안 되지만, 하면서 10만원을 헌금으로 보내왔다. 또 보험이 만기 돼 특약으로 설정하였던 주행거리 환급금이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계산하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준다고 연락이 왔다.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으며 내심 자꾸 입 꼬리가 올라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나. 우린 다만 겸손할 뿐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백날 내가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해봐야 다 소용없다. 아이엄마에게 문자를 보내 교회에서 얼마라도 병원비를 보태겠다고 하였다. 답은 오지 않았다. 그 심정을 내가 안다. 기분 참 묘할 것이다. 언젠가 누가 신학을 하는데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할 때 나는 그랬다. 왜? 내가 왜 그걸 받아? 당신이 뭔데? 자존심도 상하는 것 같고 괜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사양하고 거절하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남을 긍휼히 여길 줄도 알아야 하지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또한 때론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나는 이제 하나님을 증명하라고 하면 수천 가지도 더 그 증거를 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그런들? 그 또한 주가 전달하셔야 할 일인 것이고!
묵묵히 나아가는 길이다. 천성을 향해 간다는 길은 독불장군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으시지 않았고 그렇게 부르시지도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저들의 동행을 본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7).” 왕의 아들로서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도 천적이 될 다윗을 향한 마음이 어찌 저의 것이었겠나? 우리는 요즘 주의 마음을 달라, 주의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게 뭔지 실제의 삶으로 알겠다. 누구에게 말하길, 저는 꼭 연애하는 사람 같습니다! 도대체 저 애가 뭔데? 하루에 몇 번씩 마음을 들락거립니다.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안타까움이 또는 서러움에 어떤 염려로 애를 태우고 마음을 끓입니다. 이건 내 마음이 아닙니다.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 그렇다. 요나단에게 다윗을 향한 마음도 그러한 게 아니었겠나?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42).” 결국 너와 나 사이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 저가 계심이다. 시쳇말로 맨 정신으로 추적추적 비 오는 날, 길도 막힐 텐데, 누가 나더러 만나자고 하면 내가 안산까지 갔겠나? 견과류 한 통을 그대로 싸고 현미녹차를 싸고 추리닝 바지를 넣고 그 위에 빵을 또 몇 개 담았더니 아내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들이 왔을 때도 어딜 좀 가자고 그렇게 노랠 해도 엄두도 나지 않더니! 나도 모르는 마음이다. 내가 주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복종이라고 해서 단지 억지춘향은 아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주를 의지한다는 건 나도 모르게 주를 따라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 의도하고 노력하여 기를 쓰고 수련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아플 때 그 아픈 몸까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가 아파 죽겠지만 그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인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논리가 그렇지 않겠나? 머리로 말고 가슴으로도 말고 저절로 그리 알아서 몸도 마음도 주를 바라는 것이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6-7).” 끙, 하고 돌아누워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는 곧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아픈 일도 사역이다. 사는 게 일이다. 이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이에 대한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의 최소한의 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나는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으나 그것 또한 주의 것이라면 기죽을 거 없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다만 우리가 구할 것은, 온유함으로 받는 것이다. 온유함이란 엄마 품에 안겨 엄마만 믿는 아이의 품성이다. 죽으나 사나,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주가 행하시는 일이었으니. 알다가도 모르겠다 해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나는 결코 누구보다 강하지 못하고 믿음이 좋지 않다.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갈등하며 엎치락뒤치락 혼자서도 짜증이 날 정도로 변덕쟁이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내가 주의 것이라니!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말씀 앞에 부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그처럼 무던히 걸어가는 길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었다. 사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이를 바로 알 때 더욱 주밖에 없다. 말씀으로만 산다. 이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
고로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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