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전봉석 2019. 7. 31. 07:17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삼상 25:29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이 사람이 이 말을 했다하고 저 사람이 저 말을 했다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긍휼하심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에 휘둘려봐야 다 무슨 유익이겠나? 정작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허사라. 나는 감히 생각하기를 성경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은혜와 은총이 차고 넘친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 들리지 않고 부어지지 않으면 그게 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누구는 참고 또 기다려줘야 한다. 누구에게는 아예 소용이 없다. 누가 어떠할지 또는 어떨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주를 의뢰하는 것뿐이다.

 

아이 상태로 아이엄마와 카톡을 하고 나는 여러 생각에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약물 투여를 높이면 그 부작용으로 틱도 심해지고, 침도 흘리고, 몸은 늘어지는 대신 의식은 또렷해진다. 그래서 약물 투여를 낮추면 횡설수설 말은 의식과 따로 놀고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군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를 해보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아이엄마는 오금이 저린 것이라. 그런 상태에 누가 곁에서 주를 의뢰하자, 말씀만 의지하자, 믿음으로 잘 이겨내시라 한들. 그게 어디 머리로 안다고 되는 일이겠나? 다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속상하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지만 어쩔 것인가? 말씀처럼 난들 내가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어 달려갈 뿐이다.

 

이를 어찌 말로 권하고 설명하여 더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어서, 나는 다만 어머니가 더욱 강하게 마음먹고 주님만 의지하시라. 그리 권하는 게 다였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모처럼 허리가 좀 덜 아픈 날이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느라 오래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막내 동생네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아이들 크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저 나이 때 우리는 어땠는데, 하는 말들이 오갈 때면 내가 나이가 먹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이 들어 늙는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재산이 불어 부자로 산다는 일도 중요하다. 이를 바로 맞이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가 되고 공든 탑은 터무니없게 무너진다.’ 복음의 증거는 아주 단순하다.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8:22).” 그 남은 작업은 주를 의뢰하는 일이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주가 나를 실망시키시고, 내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고, 더 어렵게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가신다 해도! 내 행위를 주 앞에서 바로 하겠다. 이 말 아닌가? 내 안에 이는 생각이 틀린 것인지 맞는 것인지 나는 이제 그것까지도 개의치 않는다. 누구더러 뭐라 하다 더는 말을 접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 하나님을 백날 저에게 보여준들? 저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모르겠다. 나는 종종 나의 늙어가는 일에서도 주체할 힘이 없다. 용케 몸이 덜 아파서 책상에 모처럼 오래 앉아 원고를 썼더니 오후께는 오른쪽 고관절이 아파 진통제를 먹었다. 때론 기구하고 처량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그 또한, 그럼에도 나의 행위를 주께 아뢰리다. 주만 의지하겠다는 욥의 고백을 나는 부러워하고 사랑한다. 이를 아이엄마에게도 전하여주고 싶다. 그 심정이 오죽할까만. 저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느라 목이 멘다. 그 인고의 세월을 어찌 견디셨을까? 행여 지금 내 아이가 그러하다면 나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능장애가 있는 소녀가 산에서 길을 잃어 며칠째 수색을 벌이고 있는 뉴스를 관심 있게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그저 생이 이 땅의 것으로 끝이라면 이 꼴 저 꼴 만사가 귀찮을 뿐이다. 나는 아이엄마와 저녁께 카톡을 하며 아이의 상태를 듣다 그저 자꾸 마음이 아프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때 오늘 본문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가 돋보인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 이는 단지 다윗에 대해 소문을 듣고 아는 정도에서의 증언이 아니다. 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 증거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 결론은 나의 하나님이다. 나는 그리 확신한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며뭔가 대단한 일을 펼치라는 소리가 아니다.

 

어제 저녁 딸애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읽은 대목이, 그 훌륭한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 죽기를 간구하는 부분에서 황당하였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그러니 사람 별 거 아니다. 주의 은혜 빼면 시체만도 못하다. 그 한 순간에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면 은혜 위에 은혜이겠으나 자기 의지로는 어리석은 선택뿐이라. 그 숱한 주의 백성들 가운데 고작 남은 자들은 그때마다 몇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 두려우면서도 사모하는 일이다. 마치 내가 저들보다 뭔가 좀 나아서 저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입바른 소리로 다독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143:8).” 아니면 달리 길은 없다. 말씀이 답이다. 누가 백날 어떤 훌륭한 소릴 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그의 하나님이 어떠하다 한들 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결린 천문학적인 가격의 진품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백날 그 앞에 앉아 감회가 새로운들? 말씀의 실제는 오늘 이 시간 나의 부실한 육신을 능가하고 주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위인으로 살다 이름도 없이 죽었다 해도 상관없다. 모두가 나를 잊는다 해도 대수롭지 않다. 동생은 무슨 이야기 끝에 글을 좀 내라는 둥 책을 내면 뭐가 어쩌고 하면서 권하였으나, 모르겠다. 나는 이제 싫다. 그러느라 드는 비용과 시간을 한순간 더 행복하게 주를 바라는 것으로 족하다. 죽으면 다 똥 된다. 우리는 다만 이 땅의 거류민이다.

 

그러므로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4-5).” 나는 나의 날들이 어떠했으며 그럼에도 하나님이 어찌 은혜를 베푸셨는지, 내 영혼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주를 사모하며 살다 주의 품으로 가는 것으로 족하다. 오늘은 저 아이를 내 곁에 두셨음으로 나는 다만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 가지고 온전히 맡아 잘 건사하고자 할 뿐. 이 일 저 일 펼쳐서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들에 치여 살고 싶지 않다. 아이엄마의 심정도 이해를 하나 거기까지다. 죽고 못 살 것 같아도 다 산다. 인생은 얼마나 냉혹한가!

 

이를 두고 하나님을 저울질하듯 요구하고 바라고 의지한들 다 자기 좋을 대로 섬기는 것일 뿐이겠으니, 것도 때가 되면 알 일이다. 누구에게는 자꾸 뭐라 하지 말고 기다려주라고 말할 뿐이다. 다그칠 일이 아니다. 떠넘기는 게 복음이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기다리심이 무색할 뿐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55:6).” 다른 더 좋은 기회는 없다. 항상 보면 지금이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기다리실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3:19).” 결국은 주가 이루실 것이란 소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143:1).” 무던히 기도하며 말씀 붙들고 달려갈 뿐이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