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9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시편 143:11
구원은 나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것까지도 선물로 주셨다. 이 일은 전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마치 내가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알아서 그를 영접한 결과로 얻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누가 누구에게 다그쳐 구원을 권하고 이를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면박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일은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겔 36:21).” 주는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그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어찌 보면 불편한 말씀이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안하게 하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구하면 주셔야 하고 찾으면 찾아져야 하고 두드리면 열려져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듯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또 생각해보면, ‘내가 뭐라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의 은총은 날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는 것이다. 이는 마땅하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 하등에 쓸모없는 것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복음의 시작이었고 끝이다. 이 구원은 나의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에 의한 게 아닌 것이다. 누가 하도 답답해서 그랬겠지만, 성경 좀 읽고 성경공부도 좀 하고 기도 생활도 좀 하라면서, 그러지 않으면서 무슨 은혜를 바라는가, 하고 다그쳐 물었단다. 서로가 답답하니 그랬겠지만, 나는 저의 카톡을 읽으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은 올해 성경을 벌써 몇 번 통독하였고, 요즘은 교회에서 교사도 하고, 교회 청년들을 집으로 불러 밥도 해주었다면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하는 말씀이 엄습하는 두려움처럼 기억났다. 아이 일로 힘에 겨워서 휘청거리는 것인데, 너무 그러지 마라.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게 두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뭐라 하기보다 그냥 같이 있어주고 들어주고 저를 위해 기도하자. 나는 저에게 당부하는 말로 나에게도 일렀다. 언제든 우리 속엔 우쭐하는 우월감이 들기 십상이다. 너보다 낫다, 하는 생각이 우리 영혼의 목을 조른다. 사탄은 늘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 저들 부부가 행하는 일은 그래서 종종 위태롭기까지 하다.
오늘 아침 다윗의 신앙이 또 한 번 돋보인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삼상 26:9).” 이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에 대한 선처도 배려도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다. 저는 후에 노래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 나의 어떤 선행이나 열심으로 주께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앞서 행하였던 모든 선행은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이의 손에 쥐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하는 찬송과 같을 뿐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오직 주만이 나의 전부라는 소리다.
가정예배에 앞서 며칠 친정 식구들과 여행을 다녀온 아내의 말이 길어졌다. 동대문 집이 어떤데, 자기 앞으로 뭐가 어떻고, 누가 지분거려 법적으로 뭐가 어떻고 하는 말에 나는 그 일에 개의치 않기를 바랐다. 얼마를 주네 마네 뭐가 어떻고 하는 일에 휘둘리지 말기를. 손위 처남도 손해를 보더라도 좋게 서로 마무리하고 말아야지 법적으로 어쩌고 하면서 매달리다 노년에 어머니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일 수도 있다. 돈이란 그런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평생을 누가 어찌 살았는데, 하는 지청구를 내세우면 서로가 같은 소리이고 그렇게 되면 법정 다툼까지 가게 돼 있다.
그러니 모이면 어디 투자하고 무얼 더 넓히고 은퇴 후에 삶을 꿈꾸는 게 말의 중심이다 보니, 나는 들어도 싱겁고 별로 관심이 없는 일이라 뭐라 응수할 말도 없다. 본래 손가락질은 남에게 하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신신당부를 하듯 그런 일에 합세하지 말라고 일렀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어떤 자격으로 구원을 이룬 것처럼, 그 일에 일조한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이야말로 망상이고 착각이다. 차라리 안 믿는 이의 완고함보다 악하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하여 행함이 아니요! 말씀은 엄중하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기껏 다들 죽 쒀서 개 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란 게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가? 스스로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확신이 얼마나 부질없고 별 볼 일 없는 것인가? 내가 나의 구원이 나의 일정한 지분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굴다, 어느 훗날 백날 떠벌여본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정작 자신의 의와 선으로 돌려지는 모든 것은 악할 뿐이다. 나는 아이엄마에게 의사와의 상담 사실을 전해 듣고 약물을 어찌 더 첨가하고 또는 덜어내고 하면서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지 들었다. 들으면서도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말해주고 싶었다. 다만 ‘언제 차 한 잔 하러 오시라.’ 나의 말은 그게 다였다.
반드시 우리를 향하신 주의 구원의 목적은 주의 성품을 입증하시기 위함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그 때가 되면 주가 이루실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으나 오직 주의 이름만으로 신뢰하는 훈련에 참가한 것이다. 인생에 있어 우리는 거류민일 뿐이다. 잠시 여기 머무는 것뿐이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 12:49).”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응이다. 순종밖에는 할 게 없다. 내가 어디서 누구를 구원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나의 구원을 위한 일도 아니다. 이미 이루신 주의 이름을 신뢰하는 일일 뿐이다.
요즘은 내 몸도 아픈데 아이 일로 신경을 쓰고, 주변에 누구와 또 어떤 말들로 뒤엉겨 듣다보면 성경의 증거는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다. 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책임져야 하나?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빚어진 것을 가지고, 그토록 당부하고 말리고 설득하고 엄히 다스렸어도 기어이 뻘짓을 해대느라 이 지경이 된 것을 두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은총이란 주의 나라와 그의 이름을 위한 것이지 오늘 우리의 형편을 좀 더 낫게 하자고 바라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내 몸이 아파 입을 삐쭉거리며 주께 아뢰는 것도, 누구의 사연을 듣다 저의 안타까움으로 함께 먹먹해진 가슴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이 모두는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더럽힌 주의 큰 이름을 주께서 거룩하게 하심이다. 그래서 바른 믿음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으로 ‘애통하는 자’의 마음에 깃들며, ‘온유한 자’의 땅에서 확장되어 더욱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삶이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어서, ‘마음이 청결한 자’로 ‘하나님을 볼 것임’이다. 서로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었다. 이에 따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서의 삶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3-10).
고로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시 143:5-6).” 나의 날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주께서 어찌 함께 하셨는지를.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으니,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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