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삼하 2: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1
시편 백오십 편을 읽으면, 하루 한 편씩 얼추 한 해의 절반이 지났다. 일상은 늘 그날 같은데 전혀 다른 새 날이다.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궁창은 원래 금속판을 두드려 얇게 늘려 편 것을 의미하면서 둥근 천장을 연상하게 한다. 세계의 구분인 하늘이다.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매일 그 한 날의 하늘 아래에서 주를 찬양하는 것, ‘궁창’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이날이 주의 성소다. 늘 시편 백오십 편을 펼 때면 하나의 매듭이 엮이는 듯하다. 그리고 이어질 ‘복 있는 자’는 결국 주의 성소에서, 그의 궁창에서 주를 찬양하는 자이었다.
때론 그곳이 어디든, 심지어 내키지 않는 사람과 일에 있어서도,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우리는 주께 묻는다.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답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주께 고한다.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주가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어떠할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다(삼하 2:1). 앞으로의 백오십 편은 또 어떤 내용으로 채워주실까? 몹시도 무덥고 후텁지근한 하루였다. 설교원고 초안을 잡고 여러 책을 겅중거리듯 읽다가 장모 병실에서 예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때로는 하나님의 일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종종 우리가 원치 않은 길로 가라 하신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 8:26).” 본문으로 붙들고 읽다가 그 안의 내적갈등을 생각하였다. ‘그 길은 광야라.’ 더는 원치 않은 일들이다. ‘내가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주의 답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주를 의뢰하는 것이 순종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내가 어찌 알겠나? 당장은 이게 더 나은 것 같은데, 번번이 하나님은 다른 곳으로 이끄신다.
곧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4-16).” 우리의 자랑은 악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우리와 상관없는 사실이라는 데 안도한다. 내 삶의 실적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보상이 또 있을까?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이 터지고, 결국 공들였던 일이 안 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의 뜻을 돌아본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 11:11).” 주가 이루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말씀뿐이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0-131).”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데,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이런 글’이 읽힌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리할 수 있는 게 은혜였다. 나는 늙으신 장모의 병상에서 에베소서를 한 장씩 읽고 한두 마디 거든다. 돌아보면 우리의 궁창은 참으로 신묘막측하다. 누가 이리 될 줄 알았나? 가만히 장모의 생을 돌아보는 일로도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주가 오신 이유가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었을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었다. 일찍이 버려져 굿판 어머니 양녀로 살면서 온갖 잡신을 섬기던 것을 이처럼 돌이켜 주의 권속으로 자녀로 삼으신 데 따른 주의 긍휼하심이라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으니, 이는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1).”
나는 장모의 손을 잡고 지난날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런 자가 주를 멀리하고 먼 길을 돌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아, 참으로 주의 은혜가 기이할 따름이다.
앞서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나는 이 말씀이 걸림이 되었다. 곧 이 구원이 날 위한 게 아니라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나의 하나님이 나의 행복과 번영과 출세와 성공을 보장할 줄 알았던 터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는 데서 좌절하였다. 고작! 내가 더럽힌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니! 한데 병석에 누워있는 늙으신 장모의 손을 잡고 말씀을 읽고 증거하면서 알겠더라. 주의 그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신다는 그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주의 선하심을 오늘 내게 보이시는,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주를 찬양하는 일이 복되었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장모의 손을 잡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뢸 때 나의 심령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 큰 은혜’였다. 내가 바라던 정도의 은혜가 아니었다. 하는 일이 잘 되고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따위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은혜이다. 가히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라!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말씀이 그 증거였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오직 주만을 바라며 주를 의뢰하게 하시려고,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고상한 일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그 십자가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의 전부를 걸고도 확신한다.
곧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4-5).”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여전히 옹졸하고 옹색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좌절하며 실망하기 일쑤지만, 말씀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곧 그날이 되면 모두가 초대를 받을 것이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 14:16-17).”
내가 이날에 이르러 장모의 손을 잡고 서로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읍할 줄이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나는 장모에게 다시 읽어주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곧 나에게 이르는 말씀이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8-9).”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이 한 구절의 말씀으로 모든 성경의 진리가 축약되는 것 같다. 이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게 있을까? 고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살아서 내가 아직 이 땅에 있을 때에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순간이 구원이었다.
곧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 이를 위해 오늘도 하루의 궁창을 펼쳐주셨다. 나는 또한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3-5).”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내가 해야 하는 일로서의 찬양이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이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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