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전봉석 2019. 8. 7. 07:09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6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편 149:4

 

 

서로를 위하고 바라는 마음은 주의 마음을 닮는다. 같이 문병을 가고 싶어 하던 아이와 함께 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땅을 살면서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가 있고 그 이상으로 가까이하는 사이도 있다. 위하고 마음을 더할 때 주의 사랑을 배운다. 돌아와 우연처럼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더위에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근황을 서로 말하는데 더는,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관심의 방향이 달랐다. 대학 때부터 죽고 못 살 것처럼 입안의 혀처럼 굴며 지내던 사이인데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으로 관심의 정도가 같지 않은 것에 놀랐다. 앞서 아이가 아이를 위하며 격려하고 진심으로 함께 기도하던 것과는 대조적이어서 더욱 그러했을까?

 

오늘 다윗의 애도하는 노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 그리 위하고 바라던 마음이 주의 마음을 맛보게 한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149:4).” 그 기쁨은 단지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기쁨이 아니다. 주께서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기쁨이다. 그러기까지 주는 쉬지 않으신 기쁨이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5-27).”

 

주의 거룩은 우리의 더러운 죄악을 용인하실 수 없다. ‘맑은 물은 정결을 위한 고초다. 고난이다. 어려움이고 괴로움이다. 가령 친구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면서 한다는 소리가 끊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뭔 일이 있기 전엔 끊을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아뿔싸! 우리의 완고함이 얼마나 끈질긴지, 그것 때문에 결국 괴로움과 고초를 자처해야만 가능한 것이어서!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다. 결국 주께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결단이나 수고로는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이에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그러기까지 정결은 실제 고단하고 괴로우며 고통스럽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이 내 속에 두시는 주의 영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를 즐거워할 수 있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36:25-27).

 

공교롭게도 아이와 아이의 서로 위하여 주의 이름을 더하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예전의 친구와의 모처럼의 통화는 대조를 이루며 죄와 용서의 간극을 가늠하게 하였다. 어쩌다 바쁜 일상이 나는 어렵다. 오전에는 아내와 장모님 입원한 병원에 갔다 왔다. 이어 아이 문병을 가서 아이들과 같이 예배드리고 돌아보다 돌아왔다. 오는 길에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장모님 병실에 가서 같이 예배를 드렸다. 이 또한 기가 막힌 구성이어서 우리가 같이 읽은 본문이 에베소서 2장이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극적으로 살리신 게 아니라 이미 죽었던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어떠했던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나는 장모의 귓가에 대고 젊은 날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시절에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었노라 설명하였다.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그게 우리 자신들이었지 않나!

 

그처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더는 아니다. 이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를 확신한다(3-5). 그러므로 오늘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증표다. 곧 우리가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찬송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결은 오늘도 우리를 맑은 물로 씻기시는 것이다. 더렵혀진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우리는 기어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가 아이에게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엄마가 고마움을 표하며 카톡을 했다. 아이 상태를 알려주고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인 것을 말해주었다. 아이에게 다녀온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을 때 시큰둥했던 것처럼,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불행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는 말처럼 자꾸 엎친 데 덮치는 일로 힘에 겨워하는 누구에게도 그 또한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을.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요즘 내가 에스겔서 36장에 꽂혀 묵상하고 음미하며 탄복하는 것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데! 결국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 이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어찌 전달해야 할까? 친구는 딴소릴 하였고 아이엄마는 대꾸가 없었으며 누구는 그러려니 하고 마는 소리인데도, 나는 저녁에 다시 장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40:8).” 이제 우리 안에 두시는 주의 영으로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우리를 서로 같이 있게 하시는 이유였으니,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찌 이 마음을 알 수 있을까(삼하 1:26).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 자꾸 어디가 아프고 또는 무슨 일이 겹쳐 터지듯 어려움이 꼬리를 물고, 그 일로 지쳐 쓰러지기 일쑤지만, 우리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이 또한 주께서 그리할 수 있게 하셔야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알면서도 다시 담배를 물기 시작한 친구의 말이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이내 뭔 일이 터져봐야 알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때는 늦었을지도 모르는데, 단지 이 땅의 생으로 전부라면 그렇게 끝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친구에게 어떤 말을 더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들 속에 보임이라.’ 몰라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이미) 보이셨느니라.’ 다만 그저 설마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늘 저 친구들 덕에 두려워할 줄 알았다. 덜컥, 겁을 먹은 건 나였으니, 이럴 바엔 아버지 집에 돌아가 감히 아들이 아닌 종의 신분으로라도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돌이킬 수 있었던 것이 은혜다(15:18-19). 내 앞의 돼지우리와 그 천박한 먹을거리가 나를 비참하게 하였던 것이 은혜이다. 안 믿는 친구들은 여전히 거기에 머물며 괜한 수선을 떤다며 나를 우스워하겠으나, 정결케 하심은 하나님의 진노에 앞선 긍휼하심이다. 맑은 물로 씻기시는 일이 우리에게는 고난이면서 주의 은총이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왜 그럴까?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하나님이 거룩하심으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의 나라다.

 

그리하여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10:9).”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5).” 오늘 또 이 한 날을 허락하시는 이유였으니,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다. 어느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149: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4).”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