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찬양할지어다

전봉석 2019. 8. 6. 07:22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삼상 31:4-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편 148:5

 

 

몹시 덥고 힘든 날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 앞에서 두렵다. ‘기형적인 몸으로 소화불량이 오고, 종종 호흡곤란과 가슴 답답증이 생기며, 척추 1번에 문제가 있어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통증에 있고, 5번이 끊어져 허리 통증이 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틀어져서 그런 것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형외과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고 내과에 들러 혈압약과 위장약을 받아왔다. 저들의 진단은 항상 들으나마나 한 소리여서 나는 종종 절망한다.

 

오늘 말씀에서 사울 왕은 죽으면서도 그 종교성이 투철하여 그릇된 선택을 보인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부상 입은 저는 그 이유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저의 마음이 갸륵하기까지 하다.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그의 선택은 끔찍한 종교심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자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하는 말씀 앞에서 우리 사람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에 치가 떨린다(삼상 31:4-5).

 

항상 나는 저의 이야기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아니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렵다. 모든 생명은 우러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148:5).” 이는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13).” 오늘 나에게 더하시는 이런저런 여건과 환경이 나를 변형시키고 자기 입장을 두둔하게 할까 두렵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14).”

 

오전에는 병원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아내를 기다렸다. 장모가 밤새 안녕하신지 돌아보는 동안 주차장이 꽉 차서 그리하였다. 그리고 저녁 방문 시간에 들러 우리는 당분간 가정예배를 어머니와 같이 병실에서 드리기로 하였다. 하루는 무더웠고 몸은 힘들었으며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으나 이야말로 어쩔 것인가? 다들 저마다의 곳에서 그 처한 상황과 건강과 형편 가운데서 생을 다하며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모든 생명의 사명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울의 최종 선택과 가룟인 유다의 최후 선택은 모종의 경고등이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주도적인 삶을 지향하려 들 때 오는 마지막의 한 장면 같다.

 

바울 사도는 이에 단호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니까 더는 내가 내가 아닌 것이다.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18).” 곧 오늘을 사는 이유와 목적을 언급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 오늘의 한 날이 주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임의로 내 의지로 이룰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언제든지 나도 사울과 유다의 최후를 닮을 수 있다. 종종 누가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일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저의 후회 앞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수시로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고 빈번하게 그게 낫겠다는 우울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만, 주가 붙드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도 다를 게 없다. 그러므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4:6).”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 증거가 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에 대하여서는 생각지 말자. 염려든 기대든 모든 게 부질없을 뿐이니, 사람보다 허망하고 사람보다 믿을 게 없는 족속은 또 없다. 하다못해 찜통 같은 글방 안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가운데서도 그 푸름을 다하는 화초들을 나는 사랑한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하늘을 향해 경배의 손짓을 다하며 뻗어나는 창가의 고무나무를 나는 경이롭게 여긴다. 그 지긋지긋한 사울이 죽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6).” 악착같이 붙들려던 존귀도 권세도 끝이 났다. 이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13).”

 

모든 끝은 오나니, 나는 이 아침 말씀 앞에서 허허로울 뿐이다. 사람의 권세와 영광이 한낱 그것으로 전부일 텐데 세상은 점점 더 암흑천지인 것 같다. 과연 우리가 붙들 빛은 어디인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2).” 죄는 그저 암담할 따름이다. 반드시 어느 훗날에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22:12).” 과연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연히 마음은 심란하고 우울하였다. 아이와 두어 번 통화를 하고 저의 상태를 살피다 나의 그러한 수고가 어줍기만 할 따름인데, 나는 장모의 귓가에 에베소서 1장을 읽어주며 나에게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느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곧 오늘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과 그 원인과 결과가 축약된 말씀이다. 나는 늙으신 장모에게 이 기회에 그간 살아오셨던 날들을 돌아보며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돌이키어 오늘에 이르게 하셨는가를 묵상하시라 권하였다. 그 생이 곧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그 자체였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6:23).” 이 말씀을 나의 늙으신 장모의 생으로 유추할 때 척박하였던 저의 죄악 된 삶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이름을 우러르며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여종으로 삼으신 데 대해,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하시는 확고하신 주의 음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하다. 무속인의 생활 가운데서 온갖 잡신을 숭배하며 조상들을 섬기고 숭상하던 자리에서 어쩜 그렇게 쏘옥 뽑아내시듯 노모와 그의 자손들을 돌이켜 주의 증거로 삼으셨는지!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죄악으로 더럽힌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함이다! 묵상하고 되새길수록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위안이 나를 위로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날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나의 그릇된 생각이 일순간 무너지는 경험이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칼 위에 몸을 얹었고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몸을 나무에 달았다. 어쩌면 자기 위주의 하나님의 사랑을 도모하고 구하는 삶이란 이와 같은 결과와 다를 바 없는 최후를 맞는다.

 

다만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21).”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끼신다! 즉 날 위해 주가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나를 죄악과 허물에서 건져내셨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1:6-7).” 그저 다만 주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 사람을 받은 것이다. 나는 누가 병석에 누웠거나 남은 생을 돌아보아야 할 때 같이 에베소서를 읽는다. 읽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주가 우리에게 더하시는 한 날의 생의 의미와 그 무게를 다시금 돌아본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1:12).” 곧 오늘 우리의 생의 최종적인 목적은 찬송이다.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곧 나의 기형적인 몸의 뒤틀림이나 그로 인해 (의사의 자조적인 목소리로) 어쩔 수 없지요! 하는 말에 좌절하다가도 그것으로 맡기신 날을 다하는 것 자체로 찬송과 영광이 주의 것임을 증명하는 게 되어야 한다. 고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날 위해 은혜를 베푸시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오직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3-14).”

 

이 아침의 묵상은 공연히 우울해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던 나에게 들려주는 주의 음성으로 귀하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48:1).”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이에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5).” 아멘.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중략)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1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