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전봉석 2019. 8. 11. 07:14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

삼하 5:23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3:8

 

 

하나님께 묻다. 여쭈어 그 말씀을 따른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점점 묘연하여졌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하나님이 되셨다. 종교란 그런 맥락에서 사람 위주의 숭배다. 성경 구약은 종교를 말한 적이 없다. 신약에서도 바울과 야고보가 다섯 번, 저들의 종교심을 운운한 게 전부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26:5).” 종교란 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인민의 아편이다.’ 소용돌이처럼 모든 사고를 쓸어간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맹목적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13-14).” 그와 같은 열심이 우리를 해한다.

 

나는 누가 부탁한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에 답을 적으며 생각하였다. 숱한 질문과 의혹이 우리의 영혼을 더욱 완고하게 하는 것이다. 종교란 그렇듯 납득의 문제가 아니라 맹목적의 일이다.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은 그러하다. 주술이나 박수는 물론 명상이나 종교적 행위가 모두 다를 게 없다.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알기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모든 이야기는 내 이야기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아내는 병원에 데려다 주고, 딸애는 여행에서 돌아와 자고 있는 동안 나는 교회에 나가 저의 질문지에 답을 적었다. 찌는 듯이 더운 날이었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질문들의 반은 적어본 것 같다. 답을 하면서 나는 더욱 확신하였다. 지적인 허영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신앙은 삶이지 허상이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직설적인 지적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1:26).” 헛것이라는 말의 무게를 가늠하다 그만둔다. 헛살다, 헛일하다, 할 때의 그 허무함은 인생이 축약된 언어다. 나는 오후께 손위 처남이 와본다고 하여 월요일에 장모를 모실 요양병원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에 앉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있는 자들을 보았다. 머리는 대부분 백발이었고 그 표정에는 외로움이 짙게 묻어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 듯 모를 듯 외로움이 느껴졌다. 영감님들은 모여 앉아 젊은 날의 일화를 무용담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저편의 늙으신 모친들은 나란히 앉아 허공을 바라고 있었다. 헛것이라! 하나님 없이 살다 죽는 생이란 얼마나 허무할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 나보다 어려운 이를 돌보는 현실적인 실천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물들지 않는 실제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저의 두 번째 질문에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하는 데 대해 나는 생의 마지막 문턱에 있는 노인들을 보면서 새삼 그 답을 얻었다. 이미 다 보이시고 드러내고 심지어 곁에 두셨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온 이가 있다 해도 저들은 이내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리 설명하였다. 부자가 나사로를 시켜 아직 죽지 않은 자신들의 친지들에게 찾아가 주기를 바랐을 때 말이다.

 

부자가 말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16:27).”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하지만 부자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런 시절을 보냈었다. 늘 내 곁에는 누가 있었다. 돌아보니 그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두신 모세와 선지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같이 있으면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내게 보이시라, 대답하시라, 종주먹을 날리며 살았다. 항상 지혜가 곁에서 소리치고 나를 부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1:20-22).” 지혜자는 생의 기로에 서서 이와 같이 서술하였다. 우리에게 두시는 고단함과 고통과 어려움은 책망이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3).” 끝내 돌이키고 안 돌이키고는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신다. 서로의 인격적인 관계란 그처럼 막연하면서도 단호한 것이다. 가령 나는 아이엄마가 아이를 어째서 주일에 예배에 보내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뭐라 할 수 없어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는 것일 뿐이지만, 설마! 나는 아이가 불쌍하고 안타까워 사랑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저를 내게 두셨고 저를 나처럼 사랑하실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이만이면 내가 뭐라고 저를!

 

혼자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날은 무덥고 몸은 쳐졌다. 생의 끝자락에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교훈이 크게 다가왔다. 왜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게 더 낫다고 하셨는지를 알겠다. 보고 듣고 깨닫지 않으면 답이 없다. 우리의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도 관여하지 않으시는 게 주의 긍휼이시고 자비하심이었다. 이는 양날의 검 같이 예리하다. 마냥 좋은 게 아니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저의 스물 몇 가지 질문에서 반 정도 답을 적다가 밀어두었다. 이를 부탁한 누구에게 단단히 일러주어야겠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7).” 우리의 지적 호기심이 우리의 영혼을 완고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증명의 대상이 되실 수 없다. 이는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의 단적인 예일 뿐이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순수하고 당연한, 어쩌면 우리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님께 묻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9).” 여쭈어 우리의 갈 바를 주께 의탁하는 일이 귀하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23).” 그럴 때면 우리의 무모한 질문에도 하나님은 꼼꼼하게 답을 하시고 손수 그 답이 되어주신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이 말씀은 내 안에 두고 늘 되뇌는 한 구절이다. 모든 교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다. 주제넘은 일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 헛것이다.

 

나는 요양병원에서 일찍이 그 생을 다하고 노년의 때에 그 남은여생을 의탁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생각하였다. 싫든 좋든, 잘났든 못났든 모두가 마주하고 서게 될 지점이다. 그때 나는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음미하며 주를 찬송할까?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44:2).” 나를 오늘에 이르러 주를 바라게 하신 이가 또한 나를 이끌어 구원의 성장을 이뤄가고 계심을 본다. 나는 늙으신 장모의 손을 잡고 주께 감사하기를.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인 것이 인생이었다. 우리 인생에 헛것은 없다. 모든 헛것도 주께서 쓸모 있게 바꾸어놓으셨다. 고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