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시편 4:4
함부로 나서면 위험하다. 웃사를 통한 경고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 해도 자신의 생각으로 임의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이를 또한 자기 생각대로 평가하면 안 된다. 미갈의 교훈이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이에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21).” 어찌됐든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함이다. 종종 이를 헛갈려한다. 두루 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퇴원하고 가래요. 아이 말에 나는 속상했다. 전전날에 외박을 나와서 심지어 전날에는 친구를 만나 영화도 보았다더니 왜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그리 구는 것일까? 나는 아이를 나무라듯 카톡에 답을 했다. 이는 아이엄마 들으라는 소리였다. 엄마와 같이 엄마 다니는 교회라도 가서 주일을 지키라고 일렀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일피일, 이 일 저 일에서 우선순위를 미루면 영락없다. 그러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꼭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쯤 이 일 저 일 터졌으면 알기는 할 텐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둘 중 하나다. 죽어 있거나 병들었거나. 아이는 그래도 눈치가 있어 뭐라 노여워하는지, 한참 뒤 변명처럼 엄마가 같이 예배에 갔다가 가족들과 점심 먹기로 했다며 답을 이었다. 또한 더는 뭐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밴 미신적인 행위도 그러하다. 장모는 꼬리뼈에 금이 가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손톱, 발톱을 깎아 기어이 손수 그것을 화장실에 가서 물에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들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을 꺾을 줄 모른다. 문득 드는 생각이 참 사람 어렵다. 나 역시 나로 사는 게 제일 어렵다.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욥 34:15).” 별 거 아닌 몸뚱이를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어쩜 그리도 고집을 부릴까? 일련의 놓인 일들을 보면서 나는 괜히 답답하였다.
그 몸이 영혼을 지배하는지, 이내 영혼은 육신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인지.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끙, 하고 돌아누우며 서러웠다. 이번 주간에는 바람을 좀 쐬러 어딜 가려고 했는데 여기저기 자꾸 아파서 아무래도 그만두었다. 이렇듯 너무 애써 몸을 건사하는 게 피곤하다싶기도 하다. 어려운 마음으로 말씀 앞에 앉자 웃사가 말을 걸고 미갈이 손짓을 한다. 누가 누굴 탓할 것인가?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4).”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노릇이다. 주를 경외하고 두려워 떨 줄 아는 게 제일이다. 곧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4:5).” 다른 무얼 의지할 것인지.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우리는 다만 주가 두시는 기쁨으로 풍성할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말씀 앞에 앉으면 모든 게 선명해진다. 심지어 나의 육신의 고통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을 두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서도,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0-21).”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이치에 대해 가만히 묵상하고 있음으로 모든 마음이 제자리에 놓이는듯하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몹시도 더워 뜨거운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지점에서 나는 울었다. 바벨론의 강가에서 눈물을 짓는 일처럼 속절없음이 어디 내 임의로 나아지겠나 싶어서 말이다.
아이를 생각하다 아이엄마를 생각하고, 장모를 생각하다 저의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였다. 우리는 저마다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놓인 사람들이라.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2).” 오늘 시인은 절규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그리고 그 통탄의 세월을 경계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4).” 우리 안에 얼마나 수시로 ‘마술사 시몬’이 들어차는지. 저는 늘 제값주고 하나님의 권능을 사려한다. 모두가 가진 게 너무 많은 부자들이다. 그러니 저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보다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 18:25).”
스스로 가진 걸 놓지 못하는 것이 부자다. 한줌의 건강과 세 치도 안 되는 젊음과 그저 자기 배불리는 욕심과 말 그대로 ‘이 정도는 괜찮아!’ 하는 자기 허용이 모두 ‘부자’다. 고집이며 아집이고 ‘설마’하는 안이함과 ‘늘 그래왔던’ 타성이다. 더는 놓지 못하는 모든 것이다. 종종 옛날 버릇처럼 ‘맥주 한 잔 먹고 싶다.’ 할 때 그거 한 잔이 무슨 죄냐 죄가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도는 괜찮아!’ 하고 여기는 게 문제다. 굳이 결혼을 안 하고 동거를 해도 사랑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과 주일에 꼭 교회를 가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는 자신의 신념과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라며 모든 게 다 주의 것이라고 나불거리는 자기 확신의 혀가 모두 다 같다. 우리는 저마다 ‘부자’다. 그래서 자기 집 문 앞에 버려진,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기’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전혀 모른다. 진짜 몰랐다.
그러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마 24:50).” 물을 것이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22:12).” 그러므로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4:51).” 이처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어제 한 날 나의 마음을 흔들고 쥐고 가던 생각이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웃사’가 소리 지른다. ‘미갈’이 외친다. 내 안에 수시로 드나드는 ‘마술사 시몬’이 또는 저 지옥 불에서 ‘부자’가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듯 목청을 돋운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시 4:5).” 주를 의지함이란 주신 날의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사는 일이다. 은혜는 매일 매순간 필요하다. 예전의 것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새로운 ‘만나’와 같다. 은혜는 항상 새로운 오늘의 것으로 지금 이 순간의 것이 필요하다.
저들은 지껄이게 두자.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다만 주의 얼굴이 나를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다른 기쁨으로는 살 수 없다. 어떤 만족함으로도 이겨낼 수 없다. 누굴 뭐랄 거 없고 공연히 마음 어려울 일도 아니다. 나나 잘하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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