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삼하 7:28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편 5:1
긴 하루였다. 억수로 비가 퍼붓고 마음은 심란하고 몸은 어려웠다. 장모를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막상 겉에서 볼 때와 실제 그 안에서 볼 때는 달랐다. 사람들은 뭔가 숨기는 표정들이었고 책임을 맡은 자들은 형식적이었다. 저들의 응대가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장모도 역시 일반 병실에 있을 때와는 달랐던 모양이다. 저녁에 장모의 손을 잡고 예배드리며 참지 말고 뭐든 말씀하시라고 일렀다. 같이 쓰는 병실의 노인들 표정이 어두웠다. 그저 내 느낌인 것인지 실제 뭔가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은 자꾸 마음을 더 어렵게 하였다. 오후께나 절차가 끝나 옆 건물 글방으로 돌아와 잠깐 누웠다. 어디가 아프다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매일 그런 소릴 하는 것도 지겹다. 늙고 병든 육신의 고단함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주께 아뢰고 주밖에 나의 마음을 고할 길이 없었다. 사느라 기를 쓰는 삶들이 모두 부질없게도 느껴졌다. 젊은 것들이 삼삼오오 모여 억수로 퍼붓는 비를 피해 건물 입구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굵은 빗줄기로 공기는 습습하고 후텁지근하였다. 일련의 일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내 안의 여전한 육신의 걱정과 이생의 자랑이 나를 주도하려 하였다. 아이와 몇 차례 카톡을 주고받는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오후께 아이엄마가 십만 원을 부쳐왔다. 장모께 죽이라도 사드라는 거였다. 고마움을 표하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 늘 아픈 게 일이라,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것도 지겹다. 늙고 병들어 저렇듯 몸을 위탁하고 있어야 하는 노인들의 신세도 처량하였다. 장모가 안쓰러웠고 나의 늙으신 부모가 걱정이었다. 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 그저 염려와 한숨뿐이다.
그러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내 안에 드는 이런저런 근심과 걱정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려 드는지. 속상해서 그러려니 하다가도 마음이 저 혼자 꾸물대는 것을 간신히 견딘 하루였다. 뜬금없는 아이의 문자, 앞으로 일주일 잘 버틸게요! 퇴원 날짜를 세며 스스로 다지는 마음인가 보았다. 견디는 것도 신앙이다! 무심히 답을 보내고는 나의 문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견딤은 수긍이다. 순종의 다른 이름이다. 수긍은 주의 뜻을 헤아려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일이다. 모두들 백발의 성긴 머리를 하고 침대 맡에 앉아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는 노인들의 시선이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듯하였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삶을 연장하시는 이에 대한 경외다.
그러므로 견딤은 그와 대적하는 나의 마음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성경은 나에게 이를 돌아보게 하신다. 기쁨과 견딤과 오래 참음이 같은 반열에 쓰였다는 게 역설적이다. 가만 보면 그 주체가 내가 아닌 것이다. ‘이르게 하시고’, ‘합당하게 하신’ 이가 감사하게도 하실 것이다. 육신의 고통을 견디고, 마음의 서글픔을 견디고, 늙음과 병듦을 견디고, 어줍은 마음의 끌탕을 견디는 일. 나는 아이에게 감히 견디는 게 신앙이라는 답을 보내고 나의 마음도 붙들었다. 유난히 감성적인 사람이라, 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종종 휘청거린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주 앞에 서면 내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되뇌게 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악에 익숙한 데 사나 선을 행할 이유가 엄연한 것이다. 곧 우리가 할 수 없는 데 따른 견딤을 딛고,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삼하 7:28).”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복이다. 나의 특권인 것이다. 아내를 위로 하고 장모를 격려하면서 주의 선하심을 나는 나의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로써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나는 비록 어느 목사처럼 병실을 돌며 목청껏 누구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지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이라.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많고 또 전부인가? 나는 늙으신 장모의 귀에 대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주의 은혜를 헤아려보시라 일렀다. 앞서 주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리 들려주는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 이르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7:29).” 곧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이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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