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전봉석 2019. 9. 1. 07:0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왕상 2: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3-4

 

 

천하의 다윗이 죽었다. 따라서 이도저도 죽었다. 다들 사연과 사연으로 이어졌다 끊어졌다. 다윗은 죽기 전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4).” 훗날에 누구든지 인생 말년에 이르러,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6).” 요압에 대한 유언이 이를 축약한다. 그와 다르게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게 한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는 살려두다 후에 빌미를 잡아 죽인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다. 헤브론에서 칠 년,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을 다스렸다.

 

어처구니 없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가 다윗 말년에 왕을 돌보던 수넴 여자 아비삭을 달라고 한다. 어머니 밧세바가 아도니야를 위하여 솔로몬에게 청하였다가 솔로몬이 격노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 아도니야를 쳐 죽였다. 제사장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하였다. 이는 모두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아도니아를 따랐던 요압을 죽였다.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35).” 저마다의 인생사를 이처럼 독자가 되어 한 눈에 읽어볼 수 있다는 데 교훈이 크다. 당사자로 그 자리에 있을 때 어디에 중심을 두고 무엇을 따를 것인지, 일련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보며 배운다. 누군들 자신의 말년을 알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면서 길길이 날 뛰는 세월이 때론 참 가소롭다.

 

그리하여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오늘 다윗의 진술은 모든 이야기의 정의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30).” 이를 두려워할 줄 알고 또한 감사히 여길 줄 아는 것이 복되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하나님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엄연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또한 들으시는 실체의 존재이시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94:9).” 내가 혼자 되뇌는 소리도, 그 마음에 두고 은밀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주는 다 들으시고 대답하신다.

 

손위처남이 와서 아내와 같이 장모를 모시고 서울 치과와 재가요양센터에 들러 앞날을 도모하였다. 딸애는 정기검진을 받고 같이 나가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편히 쉬고 싶다고 하여 딸애는 집에 있고 나는 글방에 남았다. 누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았다. 모든 일의 진행하고 결정하는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주가 내 안에 내주하심을 느낀다. 은연중에 무엇을 판단하는 지혜를 더하심이다. 가령 어머니를 어찌할까, 하는 일에 다들 설왕설래 의견이 달랐다. 이제 좀 거동이 가능하기는 한데 예전처럼 혼자 둘 수는 없고, 형님 댁에서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일들로 되레 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개도 있고 망나니도 있어 저것들이 제멋대로라 나야말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쨌든 본인에게 여쭙고 좋으실 대로 하되 추석 주간으로 하고 본가에 들어가 생활해보시고 아무래도 여의치 않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오시라 일렀다. 아내와 딸에게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고도 하였다.

 

더 어쩌려고 하는 것도 나 몰라라 모르는 척 하는 것만큼이나 해로울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주의 긍휼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5:11).”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멀리할 줄도 아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145:9).” 아이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 그냥 둔 것은 어쨌든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도 옳지 않다. 그래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3:22).” 우리가 잘 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고 그 중심에 말씀을 두고 살아갈 뿐이다. 말씀은 반드시 응한다.

 

오늘 아침 말씀의 여러 구구한 목숨들도 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있어 긍휼의 다섯 가지의 모범이 있다. 그 첫째는 사랑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둘째는 선과 덕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 셋째는 섬김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넷째는 선교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요삼 5-7).”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8).”

 

다섯째, 마음을 같이 하는 일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4-47).” 토요일 오후, 나는 혼자 서성이며 테리 브라운, 마이클 로스의 <믿음 사전>을 읽으며 그 가운데서 이를 메모하였다. 여러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겠으나 그 끝을 누가 알까? 다만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기준을 삼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가장 복되었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24:2).” 주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3-4).” 말씀은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손이 깨끗해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허탄한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주를 모심으로 함께 주어진 날을 다하는 게 사명이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