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전봉석 2019. 8. 31. 07:09

 

 

사람을 보내어 그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그가 와서 솔로몬 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왕상 1:5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우리 곁의 악을 동원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뭉개고 있을 때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를 급박하게 바로 잡는 나단 선지자의 지혜가 돋보인다. 이렇듯 모든 일을 조종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그는 감싸고 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37:11-13).” 사탄이나 죄나 병이나 고통을 지으신 바 없으나 이것들을 조종하심으로 선을 이루어내신다.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3:6).”

 

모든 상황 속에서주를 볼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그렇듯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22:9).”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그 목적과 이유는 하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하시려고, 오늘도 이 한 날을 허락하심으로 주를 바라며 주를 의지하게 하신다. 그럴 수 없는 중에 주를 사모하는 것이 주께 영광이 된다.

 

나름 애쓰는 아이의 열심이 그래서 나는 종종 눈물겹다. 번번이 아이디와 비번을 까먹는다. 아예 내가 따로 메모를 해두어서 줘도 성급한 성미에 여러 번을 허둥대다, 기어이 새로 가져온 자기 노트북으로는 글을 쓰지 못했다. 조금은 짜증스럽고 한심한 일인데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말을 글로 옮기고, 저는 과연 그 내용의 뜻을 다 알고나 쓴 것일까? 아이를 곁에 두고 함께 하는 시간이 내겐 여러모로 교훈이 크다. 가장 절실한 관계인 엄마에 대해, 그러나 늘 대화가 단절이 되고 그러는 중에 받는 상처는 오래전부터 켜켜이 쌓여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곪아있다. 퉁명스러운 말과 되받아치는 대꾸나 존중하지 않는 언사에서 아이의 말만 듣고 엄마를 판단할 수 없으나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아이의 근저에는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수치심으로 내재돼 있다.

 

해서 뭐하나 싶은데도 같이 말씀을 읽는다. 알아듣기나 하겠어? 지가 뭘 알고 하는 말이야? 누가 되묻곤 할 때 나는 그것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알고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말씀이 하신다. 우리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깨끗이 하신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5:26).” 비로소 우리 모습을 드러내신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3-25).”

 

그런 가운데 소망을 둔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이는 결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말씀은 우리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그러므로 말씀을 우리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내가 아이를 믿는 게 아니라 또는 나의 수고와 노력을 믿는 게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은 들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어쩌면 병원 어디에서 병상을 돕는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며 아이는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럴 때 아이가 다른 의견을 말하면, 그럼 네가 다른 거 뭐 할 건데? 글방에 가서 일기만 쓴다고 뭐가 나와? 하는 식으로 엄마가 말을 하니 할 말이 없다는. 언젠가 아이가 기도 중에 짐짝 취급을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였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안타까우나 또 그 엄마의 심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어서,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을 나는 주께 의뢰하는 수밖에. 내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그러니 이 아이와 이러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 엄마의 자기 성격과 그것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틱이 나오나,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나, 그것만 봐주시면 돼요! 하는 저이의 문자를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아이와 같은 심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사랑이 또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가장 깊은 수치심으로 자리매김한다. 학깃의 아들 아도니아의 한 날의 꿈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이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오늘의 내 것과 아이의 것과 아이엄마의 것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꾸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아이가 돌아가고 나면 나는 진이 빠져 소파에 널브러진다. 고작 아이를 상대하는 두어 시간을 가지고도 이러는데 그 엄마의 심정은 또 어떻겠나? 기어이 아이는 또 이어폰을 샀다. 겁도 없이 3만 원 돈을 다 쓴 것이다. 그래놓고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를 아무리 뭐라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그때뿐이다.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다. 끝까지 자기 논리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듣다보면 그게 또 내 모습이라!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2-3).”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의 허물 중에도 숨겨져 있다. 아이를 보며 나를 인식한다는 게 때론 괴롭다. 뭐라고 해주는 말이 실은 다 내가 들어야 하는 잔소리다. 누가 꾸짖고 야단쳐주어야 할 말이다. 그러니 나 역시 내적인 갈등이 심한 탓일까? 자주 숨이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길 것 같은 불안이 자주 엄습한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나면 곤죽이 된 것처럼 잠이 든다. 아내와 장모가 어쩜 그리도 드르렁드르렁 잘도 자냐며 부러워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른 아침,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3:2).”

 

주의 손길이 느껴진다. 늘 같은 날 같으나 전혀 다른 날들로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 정말이지 하는 일이라곤 늘 똑같아서 그 일이 그 일 같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규칙적인 시간 안에 머문다. 더 잘까? 오늘은 뭐 할까? 심심하다? 하는 따위의 생각은 의미가 없어졌다. 늘 이 시간이면 이 일을 한다. 그러다 하나님이 다른 일을 맡기시면 조금 긴장하여 안정제를 조금 서둘러 먹더라도 감당한다. 답답해하는 장모를 모시고 이른 점심으로 국숫집에 갔다. 백화점 안에 있는 곳이라 평소에는 차를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니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어쩐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게 없고 못 이루시는 게 없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42:2).” 장모를 모시고 있으면서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는 닥치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늘 나 하나로 고단한데,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위로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결코 거저 생겨나는 위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 다른 데 기대를 걸어봐야 소용없다. 내가 아이를 어찌 변화시켜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아이엄마의 ‘~만 봐주시면 돼요!’ 하는 따위의 요구와도 무관하다. 다만 아이와 아이엄마와 또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애통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그 위로가 크다.

 

그때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이는 곧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어떤 공포가 엄습할 때도 있지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나는 그래서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하여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