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전봉석 2019. 9. 3. 07:07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왕상 4:34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편 26:1

 

 

누가 무슨 책을 냈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다며, 나더러도 글을 쓰라고 하고 어디에서 그러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종용하였다. 좋은 책은 지천이고 더 나은 사람들도 허다하여 나까지 그리할 마음이 없다고 답하였다. 누구는 이러한 나를 게으르다고 하였고 나는 그러한 소리까지도 감수하였다.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어서 하루에 묵상글을 한 편 쓰는 일과 일주일에 설교원고 한 편을 작성하는 일이 나에게는 과분하다고 다시 답하였다. 굳이 누구처럼 이름을 얻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이 내게는 없다고도 덧붙였다. 좋게 여겨 그리 말해주는 것이겠으나 이쯤 되고 보니 솔로몬의 분에 넘치는 지혜보다 다윗의 험난하였던 삶이 더 값지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왕상 4:34).”

 

조금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감사지만 나는 지금의 나로 족하다. 한 영혼을 건사하고 주어진 형편과 사정에서 묵묵히 주를 의지하며 따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디에 나서서 무슨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되어서 감사하다. 한 아이로 벅차고 이 한 몸으로 힘에 겨운 것이어서 됐다. 가령 누구에 대해 안타까워하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역량에서 족함을 얻고 더 나은 긍휼하심이 저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회피가 아니고 영적인 게으름이 아니기를 바란다. 하도 종용하고 바라기에 한 손으로 글을 쓰고 이 몸으로 두어 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기가 힘들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러한 나의 생활이 노엽지 않다. 돌아보며 누구를 부러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뿌리내린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위에 기초를 세운다.’

 

나는 존 파이퍼의 책에 밑줄을 긋고 이를 메모하고 여러 번 되뇌며 그것으로 족하였다. 누구에게도 그리 말해주었다. 설교집이든 수필이든 시든 세상에 넘쳐난다. 나까지 거들어 책을 낼 이유가 없다. 더 잘나고 근사한 이들이 많다. 내가 나서서 나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무슨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를 꿈꾸며 이름 석 자를 남기고픈 마음으로 열심을 다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단지 그게 다가 아니다. 견제와 질시가 동시에 오고 방어와 공격이 덩달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나는 이 말씀 위에 남은 생이 놓이기를 바란다. 내가 무얼 잘 해서 주께서 내게 더하신 은혜가 아니다. 내가 아직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용하며 나의 명성을 얻으려고 바동거릴 때 그리스도께서는 날 위해 죽으셨다.

 

그러니 이제 나를 미워하고 선에 속하기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12:9).”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모든 열심이 거짓이다. 성경적인 교육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학교에서 요가와 명상 자격증을 가진 이를 채용하여 교사로 세웠다. 학부형들이 항의하는데 교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묻기를 그게 왜 나빠? 하는 거여서, 요가는 단지 운동이 아니라 미신적인 행위와 주술이 섞인 종교이고 명상도 뉴에이지 운동과 같이 사람이 사람 스스로 평안을 얻으려 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왜 저들이 맞서야 하고 거절해야 하는지 그와 같은 항변을 지지하였다.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나? 조용히 거길 떠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리 말해주지는 않았다. 굳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

 

이는 주가 하실 수 있는 자리다. 우리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자리가 아니다. 종종 기독교 신문에서 보면 선봉에 서서 싸움을 주도하는 이의 가열한 주장을 읽는다. 저의 주장을 위해 여러 성경이 인용되고 그 의미와 목적이 날을 세운다. 그럼 또 저쪽의 주장도 같이 창끝을 겨누고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서로가 같은 동문이었고 같은 노회요, 기독교였다가 원수가 된다. 진리는 연합하게도 하지만 갈라서게도 한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듯하다. 차라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이리 고요하게 말한다. 나의 지랄맞은 성미에 그런 싸움에 말려들지 않게 하심을 감사한다.

 

무엇으로 기준을 삼아야 할까? 말씀이다. 이를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다들 저마다 성경을 빗대어, 심지어 요가 강사도 참관 수업에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우주만상의 주관자요 모든 것의 주인으로 빗대어 설명하며 희석하더라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분별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개나 소나 날 뛰는 새가 되어 날갯짓을 하는 세상이니 덩달아 휩쓸려 다닐 거 없다. 좀 어줍은 소리지만 나 하나 주 앞에 바로 서는 게 일이다. 이 아이 하나 바르게 건사하는 게 일이다. 참된 사명이란 주신 삶이 나를 속인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 뒤에 참되고 온전하신 선이 나와 함께 계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소망을 소망이라고 품고 사는 일처럼 어리석은 게 없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8:24).” 그럴 거 없다. 너무 애쓰지 마라. 허튼 데 정의를 부르짖고 한 사람을 내세워 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모든 주장은 헛되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 거룩이란 비록 내가 죄 중에 있으나 더더욱 선을 바라고 이를 주목하는 일이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20).” 이를 자유였다고 회상하는 일은 어리석다. 도로 위 흙탕물에서 놀던 시절을 희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본향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이 삶의 길을 가르치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는 동안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다. 예전의 것을 떨어내고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 주께서 오늘 내게 두시는 사명을 준행하며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거룩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비록 그 노력이 또 나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않을 것은 예수를 신뢰함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8).” 외면당하고 부정당하고 홀로 떨어져 버림받은 생을 산다 해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 삶에서 그 약속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왜냐하면 그 기간이 누구에겐 5초도 안 되지만 누구에겐 50, 500년이 걸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기도 응답을 무슨 뽑기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응답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연약하고 속수무책이나 그래서 주의 긍휼하심을 세밀하게 누린다. 죄인으로 양심에 찔려 괴로워할 줄 앎으로 용서를 맛본다. 좌우지간 하나님은 선하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그 학교 이사장으로 있는 교회 담임 목사가 왜 교장을 두둔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저의 격앙된 어조를 잠잠하라고 하였다. 본의 아니게 목사를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는 무리 쪽에 서서 항의하고 항변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차라리 떠나라. 저가 어떠하든 내버려두시는 이는 선하시다.

 

우리의 신뢰는 사람이 아니다. 목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성직자라 해도 사람인 것을 본인이나 성도나 서로가 신봉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맞서지 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 우리는 다만 말씀을 따를 뿐이다. 선을 도모하는 일이란 주만 의뢰함이다. 나의 이 지극히 소극적인 언사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을 안다. 더욱이 거기에 이권이 개입되고 권세가 부여되는 것이면 더더욱 사생결단을 내려할 텐데, 그냥 네가 다 손해 봐라. 어줍은 나는 그리 말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게, 도움이 안 된다. 뭔가 의기투합할 수 있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오늘 말씀이 나를 붙든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26:1).” 나의 완전함은 주를 의지함뿐이다.

 

아이는 여전하였고 장모도 여전하였으나 아내가 병이 오려나, 어디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너무 애쓴다 싶었다. 오늘 아침에는 장모와 아내를 둘 다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한다. 장모는 물리치료를 받고 아내는 내과에 들러 진료를 받게 해야겠다. 이처럼 삶이란 주신 바 그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 주가 더하시는 날들이라.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