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왕상 8:60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편 30:7
매우 후텁지근하고 습한 날이었다. 태풍 링링이 올라온다더니 더욱 고요하고 정체된 하루였다. ‘우리 안에는 무의미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인간성이 존재한다.’ 뭘 알겠나싶지만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열심을 다하는 아이를 볼 때면 나는 종종 경이롭다. 가령 전날에 노트를 한 권 선물로 줬다. 누구 책인데 부록처럼 붙어있던 책 모양의 빈 종이였다. 대수롭지 않게 ‘네 인생을 써’ 하고 책과 함께 내민 것이었는데 어제그제 꼼짝도 하지 않고 뭔가를 손으로 적는 것이다. ‘그 어느 인생도 결코 헛되지 않다.’ 최소한 그때의 그 아이의 모습은 내게 감동이었다. 얼추 세 시간 가까이 그렇듯 뭔가를 쓰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 기이하게도 여겨졌다. 삐뚤삐뚤 글씨는 멋대로지만 빽빽하게 써내려가는 아이의 글이 궁금하였으나 나는 그냥 두었다. 곧 우리 안에는, 설령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라 해도 그 인생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그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새는 인생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우리 안에 있는 이와 같이 근본적인 생의 욕구야말로 창조주를 향한 절실함이다. ‘이렇게 살려고 산 건 아니었어요.’ 하고 언젠가 누가 말하며 울먹거리던 목소리가 생각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남자로 또는 여자로 지으시고 누구는 작게 또는 크게, 많게 또는 적게, 좋게 혹은 나쁘게, 멋지게 아니면 별 볼일 없게 만드셨다 해도(그 모든 판단은 지극히 사람끼리의 상대적인 판단이지만), 하나님의 사람 창조는 엄청나게 위대하고 남다르게 독특하며 낯설게 신비하고 어찌할 수 없게 불가항력적인 의미이다. 나는 아이가 입을 삐쭉거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을 쓸 때 종종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얼마나 잘 썼고 무슨 내용이고 하는 따위의 평가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 자체로 위대하고 독특하고 신비하였다.
우리가 슬픔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경탄이 따로 있다. 사람은 기쁨 그 자체이다. ‘심히 좋았더라.’ 그 어떤 창조보다 훌륭하였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 하나님의 기쁨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가졌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진리이고 가둬둘 수 없는 자유이다. 바로 그 숨길 수 없는 창조주의 폭발적인 의도이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슬픔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예수 안에서 꺾이지 않는 기쁨’이 있다. 즉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우리의 견딤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3-5).”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 인내이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6-7).” 내가 어찌 각오하고 다짐하여 이를 악 물고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경이로운 인생의 역설이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이 땅에서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싫고 좋음 따위의 모든 기준은 그러므로 헛되다. 다시 보면 우리는 무명한 자 같지만 유명하다(9). 이는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일이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가!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우리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았다. 자존심이 죽고 때론 기분이 상하고 무시와 괄시를 당하는 것 같으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지지리 궁상으로 엎친 데 덮친 꼴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한다. 가난한 자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 나는 아이 앞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되뇌며 경이로웠다.
그래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아!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9).” 오늘 우리의 인내는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고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아이러니하게도 하루 종일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저를 지지하면서도 그의 이런저런 흠결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느 훗날 우리가 주의 법정에 앉아 또는 천상의 청문회 자리에서 저와 같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변론하시고 변호하실 것이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아무래도 또 수시와 수능의 계절이 오는가보다. 다 늦게 누가 전화를 하였다. 자소서를 쓰는데 몇 번 문항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문의였다. 누군지, 어디 사는지 묻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기소개서이다! 정형화되고 틀이 갖춰진 게 오히려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지원 동기가 무엇인지, 어째서 자신을 선발해야 하는지, 결국은 자기를 자랑해야 한다는 소리다. 상품화하여 어떠한 개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야 한다. 당장 제출해야 하는 것을 내가 어찌 도움이 되겠나만 그럼에도 도움이 필요하면 이메일로 보내보시라 하였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시는데 사람을 자랑하라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니, 우리 영혼이 팍팍하고 고단할 수밖에. 되레 우리의 ‘자소서’가 우리 믿음의 장애가 될 수 있다!
남보다 잘나고 대단한 것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내가 참 많이 아끼고 좋아했던 아이가 있다. 자신이 나의 둘째 딸이라고 하며 붙임성 있게 10여년을 넘게 글방을 다닌 아이였다. 정말 예쁘고 살갑고 재능이 많고 입담도 좋은 아이였다.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뒤늦게 선생이 목사가 되고, 신대원 동기들이나 교수도 저를 잘 알 정도였다. 나는 종종 아이에게 너의 유별남이 너의 발목을 잡지 않게 해야 한다. 너의 예쁜 외모가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다. 네 좋은 성격이 너를 괴롭게 하겠다. 하는 따위의 말을 했을 정도이다. 결국 아이는 더 이상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교회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다들 괜찮다는데 선생만 주의를 준다. 설교를 들을 때면 자꾸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 같아 꺼려졌다. ‘그게 왜 나빠요?’ 하고 되묻곤 하던 아이는 이내 나를 외면하기까지 한다. 저의 좋은 외모와 지식과 재능과 나름의 가치관이 저의 믿음에 장애가 되었다. 그런 거 보면 내가 글방을 하면서 유독 ‘잘난 아이들’이 많았고 대부분이 그러그러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왕상 8:60).” 솔로몬이 원하던 바를 알겠다. 이를 다윗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솔로몬의 진술을 더 들어보자.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 8:61).” 이를 훼방하는 것이 실제는 우리의 고난이 아니라 나름의 기쁨이고 보람이다. 자소서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땅에 사는 청소년들은 싫든 좋든 자기자랑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를 설득력 있게 어필하고 강조하여 자신을 스스로 돋보여야 한다.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검증이 온통 딸아이의 자소서 이야기로 뒤범벅이 된 하루였다. 참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고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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