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전봉석 2019. 9. 6. 07:08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

왕상 7:13-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일찍이 저를 두어 마침 그 일에 적합하게 하신다. 우연처럼 모든 게 물 흐르듯 한다. 억지가 없고 거짓이 없다.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왔다.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었다. 저가 성전 건축의 그 모든 공사를 하였다. 아이는 모 병원에서 돕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하루 네 시간씩이라 하는데, 더는 아직 모른다. 나는 아이에게 책과 공책을 선물했다. 읽고 쓸 것을 당부하였다. 저에게 맡기실 일을 기대한다. 아이는 흥에 겨워 공책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우리는 같이 시편을 읽었고 기도하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소파에 누워 허리를 지졌다.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47:18).” 말씀을 보내시고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할 일이다. 아이를 대할 때면 더욱 그 마음은 절실해진다. 일련의 상황을 돌아봐도 주어지는 모든 게 주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느낀다. 내 안에 어림없다고 생각하였던 일이 이루어진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3:8).” 경외한다는 게 뭐예요? 하고 아이가 물었다. 캘라그래피로 적고 있는 문장에 그 내용이 있던 모양이었다. 몇 번을 설명했으나 그때마다 다 묻는다. 우와, 경탄. 놀람. 두려움. 경이로움. 나는 아이에게 설명할 때면 과장된 몸짓과 세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아이가 돌아가고 그 말들을 새삼 되뇌게 된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 아이는 이해를 했을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자부심과 크신 사랑을 갖고 계신다. 이로써 찬송을 받으시길 바라신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96:3).” 그러므로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12:4).” 우와, 하고 놀랄 때 아이도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하였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15:9).” 상관이 없을 것 같으나 실은 모두가 주를 찬송한다. 이를 알지 못하여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에게 그 답을 들으려할 따름이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4:12).”

 

죄란 얼마나 유치한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2:13).” 생수의 근원을 버려두고 웅덩이를 판다.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에게 듣는다. 그러기를 우리는 얼마나 빈번하게 하는지, 이를 문화라 한다. 그 시대마다 유행이기도 하다. 다들 그러고 사니 안 그러면 좀 이상한 것도 같다. 어딜 나다니지 않고 누구와 돌아치지 않으면서부터 내 시야는 오히려 돌아가는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것도 같다. 하다못해 날마다 접하는 아이와 그 주변의 이야기로도 하나의 도서관이 세워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나는 의도적으로 읽게 하고 쓰게 한다. 말씀으로 이끈다는 건 같이 할 뿐이지 실제로 말씀이 하실 일이다.

 

우리에게 두신 긍휼함으로 다룰 일이다. 이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3:22).” 이를 바로 알 때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긍휼하심의 다섯 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는 사랑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둘째는 선이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 셋째는 섬김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넷째는 증언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요삼 1:5-6).” 이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8).” 다섯째, 도움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이는 받은 자로서 주고 위하심을 얻은 자로서 나누는 일이었다. 보니까 내가 왜 이 아이에게 이러한가? 내가 그러하였던 사정에서 나 역시 누군가의 사랑과 도움과 그 증언을 들었다. 한 마디로 은혜를 받은 자가 은혜를 더한다. 은혜는 적극적이고 현재적이며 나를 변화시키고 순종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별 거 아닌 것 같고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아이에 대한 유별남이 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데 나는 이제 확신한다.

 

가령 서류처리를 관련하여 아이가 오다 도로 갔다.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아이가 못 오겠다고 하면서 마음은 편해지고 속은 느슨하여졌다. 그런데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온다고 하였다. 늦게 와서는 전날에 본 면접에서 무슨 서류를 빠뜨렸는데 이를 어디에 문의를 하여 그것을 바로 그곳으로 팩스로 전달해달라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이엄마는 애가 닳아서 결국 내가 통화를 하였고, 자초지종을 듣고 메모하여 복지공단에서 무얼 확인한 후 취업하려는 곳으로 직접 팩스를 보내게 하였다. 그런저런 일이 성가시다. 아내가 부탁하는 거였으면 짜증부터 냈을 텐데, 그게 참 그럴 수가 없는 일이어서.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진다는 말, 은혜는 우리에게 선한 결단을 내리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이끄신다. 먼저는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나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번번이 투덜거린다. 그러면서도 맞닥뜨리면 또 하게 돼 있다.

 

심고 거둠의 원리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받은 게 늘 많으니 베푼다는 게 내게는 무안할 따름이다. 그런데 보면 늘 이를 통해 또한 넘치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 그러니까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한 의지를 이루어가고 계신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내 생각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잘 알지만 나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오죽하니 범불안증에 시달릴까?

 

그러다 문득 그럼에도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데 안도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나는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게 좋다. 무엇이 왜 좋은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더는 내가 내가 아니어도 되어서 좋다. 오후께 누워 <파이브 피트> 영화를 보고 울었다.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다. 그런 거 보면 알지 못하는 곳에 온갖 희귀한 병을 앓으며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을 하는데 접근할 수 없는 병이라니! 겹겹이 그 슬픔이 중복되어 공감이 좀 떨어졌다. 결국 가장 복된 인생이란 무얼까? 하나님의 자비하심 위에 삶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된다는 데 새삼 오래 머물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29:11).”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사실 앞에 감사하다 나의 일상에 있었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 나를 놀라게 하신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6).” 이내 나로 새 힘을 얻고 내 안에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