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전봉석 2019. 9. 5. 07:1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 6:1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다 그 시기와 때가 있다. 거기까지 참고 견디는 일은 막중하다.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서야 주의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여러 사사의 시대를 거쳐 사울과 다윗 왕을 세운 뒤에야 이루어진 일이다. 이렇듯 한 문장으로 서술하기에는 그 세월이 까마득하고 숱한 사연과 사건들이 서려있다. 여전히 우리의 끝나지 않은 길은 인내를 요구한다. 단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생은 없다. 기어이 주의 성전은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28:7).”

 

때로 그 길은 너무 더디다. 멀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느니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성도의 인내는 그 개인의 노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억수로 비가 내렸고, 아이는 어디 면접을 보느라 오지 못하였고, 나는 들어앉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말씀의 인도하심에 놀랐다. 먼저,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11:17).” 본문을 정하고 읽다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가진 확신과 만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곧 우리의 인내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것이다.

 

즉 우리의 인내는 그리스도와 참여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참여한 것이라 하면 '믿음으로 내 안에 들어찬 그 은혜의 확신'이다. 달리 아무 증거가 없다 해도, 말씀을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길을 떠난 아브라함과 같다. 이는 우리가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이면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다. 곧 우리 안의 착한 일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그렇다면 이를 시작하신 이가 이를 이루시는 것이지, 개인의 수고함으로 이루어가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왜 그러실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그 목적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궁극적으로 이는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저는 미쁘시다. 왜냐하면 이 일은 즉흥적인 것이거나 어쩌다 이루어진 게 아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곧 내가 무얼 잘해서, 마침 운 좋게 선택을 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면 결코 어긋날 리 없다. 끝까지 그 확신을 붙들 것이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그리 행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일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우리 인내의 증표는 십자가이다. 주의 보혈이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20).”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어려움, 어떤 고통스러운 모든 여건이 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그저 태평하여 안일함으로 나태하면 그 영혼은 병들 게 돼 있다. 사람의 몸도 그러하듯 늘 볶이고 정신없이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이와 같은 환난이 우리로 인내를 알게 한다. 곧 오늘의 인내는 연단을 이루며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에 대하여 소망을 갖는 것이다. 그 증거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 이런 우리를 결코 세상은 감당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 도리어 어리석어 보인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신비다. 이러저러한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저들은 노후대책을 꾸리고, 그것을 위해 중년의 시절을 다하고, 그 기반을 닦기 위해 청년의 때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더 어려서 학창시절에는 공부, 공부하느라 인성도 영성도 내팽개친다. 그러하였는데 노년에 이르러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완고함에 사로잡혀 그 고집으로 옴짝달싹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요 며칠 느끼는 것이지만 노인 고집은 어찌 꺾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뭘 하나 쓰고 먹고 소비하는 일에서도 자기 뜻대로 해야 한다. 돌아보니 그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할 뿐이다.

 

일찍이 인내를 버리고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끝까지 인내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즉 믿다가 그만두는 믿음은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다. 가룟인 유다가 그러하다. 가인이 그러했고, 사울 왕이 또한 그러했다. 저가 처음에 어떠했는지, 얼마나 열심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신념을 믿음으로 여긴 것이고, 그 확신으로 누구보다 종교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저들의 끝은 처음부터 참여한 자의 것이 아닌 셈이다.

 

수첩에 적고 떠오르는 대로 말씀을 따라가다 보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왜 우리가 서로 그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 그것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들이 모두 하나였던 것이다. 가령 이번에 누가 자녀 학교 일로 마음이 어려웠다. ‘명상과 요가를 교과목에 넣고 하나님을 무슨 색깔로 그의 성품과 속성을 가르치며, 미술치료라 하고 또는 상담교사라 하는 여러 직분(?)을 통틀어 교사가 채용된 것인데, 저는 이를 어쩌면 좋은가 물었고, 그렇다면 참관 수업을 하여 직접 들어보고, 이것이 성경적으로 또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옳은가 하는 것을 강하게 피력하도록 말해주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두루뭉수리하게 뭉뚱그려서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얼버무릴 문제가 아니다.

 

마치 내가 부추겨 일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움도 있었으나, 어쩌면 좋은가? 하고 물었을 때 나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며칠 속을 졸이며 우리 안에 두시는 불편함을 인내하며 보고서를 쓰고 질문지를 만들고 이를 이사장인 담임목사에게 먼저 알려 그의 의중을 알아보는 것으로 우선 가닥을 잡은 모양이었다. 다 저녁에 장문의 카톡이 들어왔다. 요지는 그 학교의 이사장이면서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정중히 사과를 하였고, 인정하였고,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불찰을 바로잡겠노라는 것이었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늘 우리가 서로의 곁에 있는 이유였다. 이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가졌던 그 확신을 끝까지 붙들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도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28:7).” 그리할 수 있는 증거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인내하는 것으로 그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다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5).” 그러나 우리가 결국 주의 성전으로 지어져간다는 것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찬송할 수 없는 중에 주를 찬송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7).”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