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전봉석 2019. 9. 18. 07:10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2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시편 41:3

 

 

날마다 하루가 정신없다. 누군 어디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거절당했다. 너무 고학력이라 서로들 꺼리는 사태에 난감하다. 아이는 기껏 안산까지 가서 약 처방을 받았는데 그걸 두고 와서 다시 오가느라 오후가 다 지났다. 멀쩡하던 아이는 불안을 호소하고, 감정기복을 견딜 수가 없어 이내 병원을 찾아 상담을 하였다. 누구는 감옥에서 출소하여 의기소침하였고 그의 부친은 그나마 막일도 자리를 잃어 투덜거리며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아들을 위해 차렸던 미니술집을 그 애 엄마가 장사를 하게 되었고 건강을 자신하던 이가 신장이 망가져서 투석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난무하다. 오늘 성경은 능력 있는 주의 선지자 엘리야가 이사벨을 피해 숨어 로뎀나무 아래에서 실의에 빠진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당당하고 굳건하였던 모습은 간 데 없다. 모두가 그러그러한 지진 가운데 주의 세미한 음성이 들린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2).” 하나님은 우리를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나만의 로뎀나무 아래이고 은밀한 장소이다. ‘물 반, 고기 반처럼 우리 안에는 기도 반, 염려 반이다.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천하의 엘리야도 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할 때,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41:3).” 한 번이 아니다. ‘누워 있을 때마다주께서 고쳐주신다. 함께 하신다. 우리는 도망치듯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실의에 빠져 주를 찾는다.

 

골방이라야 온전히 주를 만난다. 번잡스러울 땐 들리지 않던 세미한 음성이 지진 후에 불이 있어 불 가운데서들린다. 골방은 비로소 온전히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다. 더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 들으라고, 누가 보라고 할 소리도 아니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기도는 결코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은밀한 시간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내밀하고 농밀한 자리다. 주님, 하고 부르면 더는 할 말이 없어도 되는, 가만히 가슴을 쥐고 눈물을 지을 때 주가 내 곁에 계시는 전능자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는 중에 감사가 오고 평안이 깃든다.

 

참 신기하지? 하나님은 왜 다 아시면서도 아뢰라고 하는 것일까?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4).” 그러니 중언부언할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8).” 다 아시면서도 우리로 구하게 하시고 찾게 하시고 두드리게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 그러는 중에 나의 생각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하신다. 함부로 지껄여서는 안 될 일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5:2).”

 

목사로 살면서 가장 흔한 말 중에 하나가 기도를 부탁 받는 일이다. 또는 기도할게요.’ 하는 나의 응대다. 하지만 정작 기도란 주님과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고, 내가 내 문제로 씨름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기뻐함을 얻는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니다. 예수님은 엄연히 저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래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계하셨다. 무슨 말인지 그 의미도 모르면서 화려한 언변으로 늘어놓는 기도를 원치 않으신다. 저들은 기도를 규정하였고 그 시간을 정하였으며 제도화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된 기도문을 읊조리는 것으로 개인적인 아룀을 막아놓았다. 스스로 경건을 도모하는 것으로 기도를 대처하였던 것이다. 이를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5).”

 

앞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데 있어 간절할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들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11:8).” 끈질기게 주께 구한다는 것은 그러다마는 게 아닌 절박함이 있다. 간절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구함이다. 그러므로 계속 그러할 수 있는 것은 주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그 때가 찼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회개가 나오게 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4:4).”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그러므로 우리는 요구를 하다 회개를 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이 땅에서의 삶이란 기구하지 않은 생이 어디 있을까? 다들 멀쩡한 것 같으나 모두가 병들었다. 저마다 우환이 있고 이를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고 방치하고 그러려니 여기면서, 아프지 않다고 한다. 결국 또 어느 아이는 핸드폰을 정지시키고 잠수하였다. 다시 집안으로 처박힌 것인지, 더 상태가 악화된 것인지, 나는 아이엄마에게라도 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누구는 그런데도 괜찮아요, 다 그렇죠 뭐, 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굴었고 나는 저의 열심이 위태로워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 문득 드는 생각이 다들 너무 인생에 허비하는 열심이 많다. 다 늦게 학위를 더 따느라 기를 썼던 만큼 몇 번의 거절이 저이에게는 더 아픈 상처로 다가온다. 굳이 혼자 외국으로 나가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그 일에 대단한 열정을 품은들, 누군 아파트를 리모델링한다며 수천만 원의 돈을 들이면서 몇 개월째 월세살이를 한다. 누군 몸을 만들겠다며 억지로 굶고 몸을 구르고, 누군 더 나은 직장을 얻으려고 밤마다 무슨 고시학원을 다닌다. 그러느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수고에는 다들 여념이 없는 것이다.

 

저들을 보다 나는 그만두었다. 병원에서 무슨 체질개선을 위해 먹어보자고 한 약을 던져버렸다. 어지러운 것은 둘째 치고 속이 울렁거리고 불안이 가중되어 안정제를 배로 먹어도 진정이 안 되었다. 굳이 나으려 애쓰느니 다독이며 그냥 살란다, 하고 치웠다. 이런저런 일로 아이가 오지 못했고, 누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가 그만두어 다행이었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사는 것이 복되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너무 기를 쓰고 살 거 없다. 주신 날에 감사하며 그 처지에 맞게 평안한 것이 복이다. 이제는 전의 내가 아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전에 붙들던 노력들이 모두 허사인 것을 잘 안다. 오늘 시인은 그리 노래하였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41:9).” 사람 볼 거 없다. 내가 이룬 공든 탑을 의지할 것도 없다.

 

천하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 누웠다. 그 이 생의 결과는 죽고 싶을 따름이다. 우리가 예측한 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잠깐 그런다 하여 우쭐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강연을 하고 성공사례를 지껄여댄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며 저를 통해 찾고, 두드리고, 구한다.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는 이제 전혀 다른 자들이다.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그것은 주께서 우리 안에 오셨음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7).” 내가 여러 말로 바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같으나, 실은 주께서 날 위해 간구하신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살자. 살아서 주께 영광을 올리자. 그 일은 오늘이라 일컫는 하루 중에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이었다.

 

그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이제는 우리 각자가 골방으로, 주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새로 복용하기 시작한 약 때문에 유난히 불안하였고 몽롱하였던 하루였다. 누구 이야기에 누구의 사연이 더해져서 내 안에 이는 안달로 볶이고 시달리는 하루이기도 하였다. 그러느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골방의 하루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1:4).” 언제나 주 앞에 통회하는 심정으로, 그러나 감사로 평안으로 바꾸시는 주님 앞에서,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