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봉석 2019. 9. 16. 06:37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왕상 17:24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아침마다 주께서 나를 울리신다.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이라 따로 설교원고를 준비하지 않았다. 일찍 올라가 묵상글을 읽고 있었다. 뜬금없이 누가 문자를 했다. ‘집 앞 가까운 교회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순간 느닷없고 난데없는 문자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날까지도 시큰둥하여 좀 더 오랜 시간을 가져야 하는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마워.’ 하고 답을 하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이번 명절은 몸이 안 좋아 가족들과 같이 보내지 못해서 서운했다, 생각했는데 기어이 저를 만나게 하시려는 거였다. 만일 일정대로였다면 모처럼 문자를 주고받고 안부를 묻고 형식적인 인사로 그쳤을 일이다. 그러려고 그러셨나보다, 아버지가 말씀을 전해 듣고 그리 호응하셨다.

 

여인이 말한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 어느 날 엘리야에게도 가뭄이 왔다. 그러할 때 주의 말씀이 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8).” 우리가 주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이 임하시는 삶이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 졸지에 비루한 삶이 닥친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가 이루시는 놀라운 사역이 있었다. 나는 가슴이 벅찼고 감사하였다. 그저 우연히 30년 만에 연락이 닿아 얼굴을 본 게 아니었다. 그저 저의 신세가 한심하고 불쌍하여 안타까워하라는 게 아니었다. 싫어하든 좋아하든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인의 절규는 종종 세상이 우리를 대하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하여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39:2).” 종종 이와 같이 희한한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진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왕상 17:24).” 우리로서 사명 붙들고 말씀만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구나! 오후께 아이가 뜬금없이 문자를 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상담할 게 있는데 가도 되는가, 하고 물었다. 학교 안 가는 월요일과 수요일이 좋다고 해서 오늘 오전에 왔다가 점심에 다른 아이와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슬쩍 궁금하여 물었더니 불안증이 온 것 같다. 혼자 병원에 들러 안정제를 받아 복용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우선 좀 더 들어봐야 알겠으나, 나야말로 갑자기 숨이 답답하고 속이 불편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설사를 하고 순식간에 마음이 어려웠다. 괜히 속상하여 일찍 잠에서 깼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39:6).”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마치 다 괜찮을 줄 알지만 모든 일은 터지고 난 뒤에야 후회라. 원인이 무엇인지, 왜 나에게 그런 일이! 하는 따위의 의구심은 금물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게 헛되지 않다. 그것으로 우리는 주를 바란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이에게 마음 편히 먹고 내일 보자고 하였다.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였다. 혼자 견디기 힘들어 그 일을 부모에게 알리니 다들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난데없고 느닷없이 인생의 가뭄은 온다. 주의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저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로 숨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왕상 17:2).” 말씀이 임하신다는 게 우리 생각처럼 낭만적인 게 아니다. 추상이나 관념도 아니다. 막연한 신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나는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고 마음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거두시고 함께 하셨음을 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3-4).” 그리하여 사르밧 땅 과부를 만나게 하시려는 것이다(9). 우리의 삶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님을. 그러한데 말씀의 원리는 하나였다. 슬픔 중에도 기뻐하라는 것.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0-21).” 나는 이제 아이에게 무엇을 말해주어야 할까?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하는 아이의 말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럼에도 내가 보여주어야 할 것들. 세상은 결코 우리를 길들일 수 없으며 아무리 거칠고 험악하게 우리를 다룬다 해도 우리 영혼을 가두어둘 수도 없고, 무시하고 코웃음 친다 해도 이 진리는 외면할 수 없으며 아무리 쥐고 흔든다 해도 결코 뒤집어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이를 아이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아니 저의 부모가 각각 일찍이 청년시절에 믿었던 이들로서 주의 부르심에 어찌 호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답이 되어야 한다. 나는 늘 아이에게 그리 일렀고 그 가정에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하였었다. 혼자 교회를 다니고 혼자 믿는 것 같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을 말이다.

 

우리 안에는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하여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아이와 함께 한지 10년이 넘는다. 그동안 글방 선생에서 교회 목사로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자랐다. 늘 꾸준하여 하나님이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사뭇 궁금해 하고 있던 터였다. 또 이 무슨 일일까?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3).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이는 우리의 사명이며 숙명이다(4-8).

 

나는 다만 말씀만 붙든다. 아니 말씀이 나를 붙드시기를 기도한다. 내가 저 아이에게 또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늘 우리의 어려움은 주를 위해 견디는 것이어야 한다. 보여주어야 하는 성품이 되게 한다. 이는 결코 외로운 싸움이 아니다. 단지 무모한 견딤이 아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6-17).” 우리에게는 엄연한 무기가 있다.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썼다. 성령의 검을 가졌다. 이것이 바울이 증거하는 우리의 역설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겠나?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역설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6).”

 

다만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모든 것은 어느 것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으나 우리는 유명하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4:9).” 주변의 이런저런 사람들과 저들의 삶을 돌아보면 알 수 있는 증거다. 우리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았다. 때론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고 괄시를 몸에 받고 살지만,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내가 옳다고 추구하던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다. 오히려 우리의 잘남, 외모나 학력이나 재산이나 지위나 명성이 정작 우리 믿음의 장애물이었다. 이를 아이에게 어찌 말해주어야 할까? 새벽 일찍 눈을 뜨고 답답한 가슴으로 말씀 앞에 앉았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39:6).” 우리의 이와 같이 헛되고 헛된 현실 앞에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이 생각으로 마음은 언짢은데,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9).” 단지 그것이 일시적인 증상으로 스트레스 때문인지, 말하지 못한 응어리가 있어서인지, 또는 그 부모를 돌이키고 가정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일인지, 저를 정말로 주의 종으로 삼고자 하시는 일인지, 정말이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12).”

 

그저 한낱 인생이란 없다. 저 한 영혼을 붙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역사는 온 우주적인 섭리와 경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주께서 나의 입에 할 말을 부으시고 들을 말을 귀에 담게 하시기를. 고로 회개가 아니면 희망도 없다. 우리는 할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이 모든 게 주의 일하심이다. 그러므로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39: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