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전봉석 2019. 9. 17. 07:15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왕상 18:4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시편 40:11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주를 바라게 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말씀을 찾아 묵상하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말처럼 염려 없이 산다는 게 그리 쉬운가? 그런데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그럼 염려가 안 생긴다는 게 아니라 염려가 따를 때 그저 염려할 것인가, 염려로 인해 기도할 것인가? 하루에 수골백번의 염려가 일어나면 그 수골백번을 기도하면 된다. 기도와 간구로 아뢰는 일이다. 시시콜콜 시시각각 그리 아뢰고 구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러는 중에 감사를 발견하게 된다. 죽을 지경인데, 힘들고 고단해서 말도 못할 염려가 휘몰아쳤는데도 그 안에서 감사를 발견한다. 여기까지 함께 하신 주의 은혜에 대하여, 나는 비록 쓸모없고 보잘것없으나 그때마다 주께서 어찌 나를 인도하시고 이끄셨는가, 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알게 된다. 가만 보면 감사는 의지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감사의 의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것으로 넘친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4:2).” 그렇구나! 기도는 너무 멀게 느껴져 보지 못했던 것을 끌어당겨 크게 보여주는 망원경이고, 기도는 너무 작고 하찮게 여겼던 아주 작은 것들을 크게 확대하여 보여주는 현미경이다. 염려가 여전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 기도다.

 

또는 염려로 인한 기도는 집중이다. 오만잡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것에서 놓여난다. 실제 염려는 내가 조금 아는데 대부분은 그저 예기불안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끌어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다쳐, 너 그러다 죽어, 하는 식으로 염려는 수시로 들락거리고 100세 인생을 운운하며 몇 살까지 살줄도 모르면서 노후를 준비한답시고 염려부터 한다. 예수님은 엄연히 명령하셨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12:22).” 얼마나 우린 자잘한 것들로부터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발을 동동구르며 염려하는지! 그러느라 정작 집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그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해 기도는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하라, 간구하라, 아뢰라, 성경은 연거푸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염려 때문에 기도를 선택하면, 이상하고 신비로우며 희한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는데 말도 안 되는 평강이다. 여전히 죽겠고, 힘들고, 걱정에 근심이 사무쳐 못 살겠는데, 그래서 기도를 하면 그러는 중에 나도 모르게 내 안에 평강이 있다. 이를 어찌 증명할 수도 없다. 말해봐야 남들은 모른다. 세상은 알 수 없는 평강이다.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아뢰라는 것이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그러면 기도는 우리에게 감사를 발견하게 한다. 감사가 끊기면 염려에 휘둘리고 염려가 몰아치면 기도를 한다. 염려로 인해 기도를 하면 감사가 다시 회복된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되면 놀랍고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우리 안에 거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신기할 따름이다.

 

이에 우리는 비로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가 우리를 지키시고 계심을, 언제부터든 언제까지든 우리를 지키셨고 지키고 계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4:6-7). 공황 증상이 일어나자 아이는 놀랐다. 다행히 지혜롭게 판단하여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 아이가 왔는데 순간 불안해하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나는 처방해준 알브람정 0.25를 먹게 하였다. 이는 그저 감기 같다. 혹은 두통과 같아서 거기다 대고 왜? 뭐가 원인이야? 하는 따위의 분석은 무의미하다. 나는 아이에게 두 가지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스스로 위로를 찾는 경우가 하나이고, 그럼에도 주를 신뢰하는 방법이 또 하나다. 누구는 평안을 구하려고 길을 나선다. 산을 가고 경치 좋은 데서 요양을 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거나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위로를 구한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이다. 또는 늘 배신을 한다. 처음엔 좋았다가 나중은 더 형편없이 된다.

 

기도하자. 나는 아이에게 일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나는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 염려가 엄습하고 불안이 공포로 바뀌어 병적으로 나를 휘두를 때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그럼 나아지고 염려가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나는 연거푸 주를 바란다. 하루에 열 번이면 열 번, 백 번이면 백 번,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다. 아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가 선택하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는 교회를 떠났다. 보다 자유롭게 살려고 한다면서, 그랬더니 불안이 사라졌다고 자랑한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더 나은 듯 자유로운 듯 당장은 술 한 잔이, 어디 경치 좋은 곳에서의 여행이, 좋은 친구들이, 훨씬 더 나은 듯하다. 그래서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편이 더 나은 듯도 하다. 그리 항변하는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굉장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언제 어디서나 아무 때든지 주께 아뢰고 간구하고 구할 수 있는 특권이다. 애써 유럽여행을 떠나 친구를 찾고 술에 취해 더 자극적인 방법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리하면하고 우리의 기도에는 엄연하고 확실한 보증이 있는 것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그처럼 내가 나를 지키려고 아등바등 용을 써야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

 

나는 아이에게 말하길 우리에게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있다. 이 땅의 삶으로 끝이 아니다. 만일 이 땅의 것으로 끝이라면 뭐 그리 대단히 허우적거리며 살까? 죽음 너머의 세계는, 심판은 우리들로 하여금 지금, 분별하도록 한다.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경건하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정결하며, 무엇이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이 칭찬받을 만한지, 무엇이 덕인지 기림인지, 그래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 우리가 주를 앎은 영생을 앎이다. 이 땅에서 고작 몇 년을 더 살지 우리는 알 수도 없으면서 그리 기를 쓰고 염려하고 애써 죽을힘을 다해 산다. 그런데 영원한 삶을 두고는 언제까지 수동적일 것인가? 단지 우리의 죄를 모두 탕감 받는 것으로 족해서는 안 된다. 통장에 잔고가 없다. 창고가 비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6:20).”

 

너무 나으려고 애쓸 거 없다. 그저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착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런들? 이 모든 사실은 우리 주님이 모르실 리 없고, 그럼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우리가 아는데 저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것을 두심으로 가장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심이다. 아이에게 그리 일렀다. 지금 하고 있는 묵상글을 좀 더 수고하여 자신의 한 날을 마주하는 계기로 삼을 것과 이를 굳이 숨기거나 안 그런 척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순응할 것을 당부하였다. 천성이 착하고 여린 아이다. 내면이 유약하여 안으로 삭히며 혼자 끌어안는 타입이다. 나는 아이의 증상을 보면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공부 때문에, 앞으로의 진로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았다. 안 믿는 부모와 가정에서 홀로 신앙을 지켜오면서 느껴야 하는 이중적인 부담이 있었다. 교회를 오면 일요일에 집에 있는 가족들이 마음에 걸린다. 어디 갈까? 뭐라도 먹으러 나갈까? 하였는데 자신만 빠지고 교회로 온 것이니, 그로 인해 다들. 그렇다고 가족들과 일요일을 보내려면 교회를 빠져야 하고. 나는 아이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였다.

 

그러니 어쩐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결하려 들 것인가, 아니면 주를 의뢰하며 주께 모든 것을 맡길 것인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의 능력이 필요하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 18:46).”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을 비결이다. 누구보다 느린 것 같으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달려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께 기도한다. 염려는 기도하게 하시는 주의 신호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40:11).” 아무개야! 하고 부르시는 주의 음성이 염려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 수시로 드나드는 염려로 인해 기도한다. 그럼 우리는 발견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위로가 주께 있음을. 감사와 평강이 주로 인한 것이었음을. 주가 지키심으로 우리는 거뜬하다는 것을.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