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전봉석 2019. 10. 3. 06:47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왕하 12: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력으로 요하스 왕이 성전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도로 우상숭배를 허용하고 이를 경고하는 스가랴 선지자를 죽였다. 이에 아람 왕 하사엘이 침공하나 요아스는 회개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들은 거듭 되풀이 되는 일이다. 그저 사사롭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둑은 무너진다.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2:3).” 말씀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잠들기 전 늦은 시간에 친구가 전화하였던 것으로 마음이 심란하다. 술에 취한 목소리로 옛날이 그리워서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집으로 그만 들어가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 좋지 않았냐? 하며 저는 자꾸 옛날 일을 끄집어냈으나 돌아보면 그때만큼 버겁고 지겨워 바동거리던 때도 없었다. 솔직히 그리 말해주었다. 나는 지금이 좋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다. 나의 말에 저는 서운한지 계속 그때, 무엇이, 왜 좋았다고 주정을 하였다.

 

그래도 다시 주일 날 아내와 함께 교회를 나간다고 했다. 교회에서 같이들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는데,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같이 할까, 아니면 혼자 해보고 할까? 하고 묻는 걸 당연히 같이 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 변화에 나의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틈으로 둑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작은 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오기도 한다. 언제 나랑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나의 마음이 벅차기도 하였다. 혀 꼬부라진 소리로 술주정하듯 뇌까리는 말이었으나 그런 말과 마음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해 너무 서운한 게 많은 것 같았다. 늦게까지 주절거리는 소리를 들어주고 잠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56:3).” 나는 이제 주를 의지한다. 전에처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거기서 낙오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나는 그래서 친구가 자꾸 그때가 좋지 않았냐? 하고 물을 때 어떤 그리움도 없었다. 아니, 나는 지금이 가장 좋다! 하고 말하면 친구는 자꾸 미덥지가 않다고 했다. 그 말 또한 이제는 상관없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9).” ‘내 원수들곧 우리 안의 수치심들이 그것이다. 기를 쓰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그처럼 우리를 경쟁사회로 몰아갔다. 지금도 저가 악착스럽게 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내가 있고, 두 아들이 있고,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자꾸 어디가 아프다고 하지만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어서 일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저가 하도 투덜거려서 그 작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하고 친구를 나무라듯 언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렇듯 여전히 엉터리로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저를 돌이켜 교회로 다시 나가게 하시고 급기야 성경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는데 할까 말까 하는 마음도 주셨는데! 이를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급기야, 난 너랑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이 나왔으니. 나야말로 감격이고 감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1 때 같은 반으로, 저 친구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게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자살을 생각하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수면제를 모았었다. 얼추 6개월은 도모했던 것 같다. 그때의 우울감은 어찌 말로다 형용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한 봉지 정도 그 양이 모아졌을 때, 그래도 누구 한 사람에게는 알리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저 친구에게 슬쩍, 나의 치밀했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제와 웃기는 이야기지만 서로는 자못 심각해졌다. 나는 나대로 괜히 말을 꺼내서 반년을 다져먹고 있던 마음이 흔들렸고, 나의 결연한 이야기에 놀란 친구는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했다. 애초부터 설득할 수 없는 일을 털어놓은 것부터 나의 마음이 붙들린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친구는 그런 사실을 담임에게 알렸고 담임은 부모에게 알려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평생을 이래저래 같이 동무가 되어 지내온 세월이었다. 그때가 좋지 않았냐? 하는 친구의 술주정에 나는 이제 내가 그리워할 수 없는 날을 두고 어떻게 친구 곁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인지! 기도할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나는 못하지만 나의 하나님께 아뢰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수밖에!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3).” 내가 저를 어쩔 수 없는 것은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는 일과 같다. 내가 기도를 할 수조차 없을 때에도 주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심을 이제는 잘 안다. 그 사랑을 확신한다. 돌아보면 나야말로 더는 돌이킬 수 없을 줄 알았다. 용서 받기는커녕 더욱 사무치는 서러움과 버거움으로 생을 어찌 짊어지고 가야 할지도 몰랐다. 이쯤되니 지겨운 것이다. 두 아들이 있으나 자신을 아버지로 알아주지도 않고, 아내가 있으나 의지의 대상이기보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습하고 치다꺼리해야 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고. 나는 사는 게 재미없다! 저의 푸념에 나 역시 깊은 한숨뿐일 때!

 

문득 낮 동안에 묵상하였던 시편 13편의 다윗의 절규와 회복을 떠올렸다. 여섯 줄로 된 이 시는 각각 두 연씩 탄식과 절규에서 기도로 나아가고 급기야 찬송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 전문

 

때로 우리 생이 얼마나 암담한가? 그게 병 때문이든, 사업의 실패 때문이든, 존재론적인 외로움 때문이든, 그 모든 근간에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까짓 죽으면 그만일 것 같지만 그러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게 있는 것이다. 탄식의 단계에서 보면 거듭 강조되는 시어가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는 것이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고, 살아도 살아도 사는 게 아무런 낙을 주지 못하는 것 같고, 한다고 하고 한다고 하는 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는 법이다. 아이엄마가 전에 아이 일로 통화하다 울면서 그리 서러워했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장애아를 안고 사는 일이라는 게 그렇듯. 그러니 우리 안의 탄식과 절규는 종종 하나님께 향한 원망으로 터져 나온다. 가까운 데 계신 것 같으면서도 찾으면 없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는 것 같고! 소리를 쳐도 들어주는 것 같지도 않고! 같은 맥락에서 욥의 절규도 참으로 암담할 뿐이다.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21:4, 6-8).” 또한 누구의 엄마가 울면서 하던 말도 떠오른다. ‘왜 나만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하나님께 바라는 거 없어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게만 해달라는 데 그게 그렇게 사치인가요?’ 저들의 말이 오버랩 되면서, 나는 친구와의 통화로 마음이 어려워 일찍 잠에서 깼다. 그리고 말씀 앞에 앉아 묵상글을 쓰고 있다. 그때가 좋지 않았냐? 하고 묻던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도 까마득하고 서러움은 여전하지만, 이제 나를 여기에 두시는 하나님의 까닭을 잘 안다! 우리 주님도 절규하고 계신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49:15-17).”

 

그럼에도 나와 친구와 아이엄마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래도 우린 기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또는 아이엄마에게 기도할게요, 기도할게, 하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의 위로가 거기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목사님이 스물아홉 살 먹은 딸이 위암으로 죽어갈 때 딸애의 병상에서 쓴 묵상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님, 저는 이제 기도할 수도 없고, 저의 믿음의 심지도 다 꺼져가는 것 같고, 감사와 찬송은 빼앗긴지 오래고, 더는 싸울 힘도 없사오니, 주여, 주님이 책임지시고, 주님이 기도해주세요.’ 감히 누구의 슬픔을 앞에 두고 나도 그 심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나만, 시편 13편에서 다윗과 같이 우리는 이내 탄식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내 눈을 밝혀주옵소서.’ 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13:3).” 우리 이 몽매한 육신의 눈을 뜨고 영안의 눈을 뜰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저마다 원수가 없는 생은 없다. 그것이 육신의 질병이든, 사업에 실패든, 자식의 문제든, 그 어떤 존재론적인 낙심이든,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4).” 그리하여 기도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비로소 찬송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실은 그대로고, 짊어지고 있는 것들도 그 무게는 달라진 게 없는데도,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 바로 그 오직의 자리까지가 이처럼 멀고, 서럽고, 힘에 겨운 것이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바로 그 자리가 찬송의 자리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이는 전날에 뭐라 했던 걸 귀담아 들었는지. 사실 어찌 설명할 길 없는데, 아이와 대화를 하는 일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런 소릴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고, 쟤가 알아듣기나 할까싶고, 그러니 하나마나 한 소릴 텐데 그만둘까도 싶고! 그러함에도 말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는 이가 우리의 그 시간을 주도하신다.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목사님, 저 옷 안 사기로 했어요. 엄마 준다고 그랬어요. 저축하려고요. 이 유치한 몇 마디의 말이 나를 감동하게 하였다. 스물셋된 아이의 말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리겠으나, 남들이 뭐라 하든 저 아이의 영혼을 붙드시는 이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거였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56:9).” 이렇듯 다만 기도할 뿐이다. 어느새 그럼 찬송의 자리였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3).” 아멘.